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어제는 3.1절이었습니다. 토지를 읽는 중에 맞이하는 3.1절이라 특히 감회가 새롭습니다.
그동안 항상 3.1절에는 순국선열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 시절에 내가 있었다면, 나는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감사함과 숙연함을 느꼈던 것 같은데요.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저 그분들이 그렇게 되찾고자 했던 조국. 그 조국에서 이렇게 좋은 세상을 누리는 후손으로서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무언가 송구한 감정입니다.
이번 주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해 14권을 읽는 중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어져 죄송한 마음이지만, 언제 다시 읽기도 힘든 이 책을 속도에 연연하며 읽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끝까지 잘 완독하고 나누어 보겠습니다.
토지 3부 후반에 이르러서는 박경리 작가님의 혜안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예리한 통찰, 논리적인 비판이 어우러진 엄청난 필력에 특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박경리 작가님은 작가로서의 기본인 사람들의 입에 착 달라붙는 빠져드는 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정서, 거기에 더하여 방대한 역사적 지식,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가운데 아주 예리하고 논리적이야 집어낼 수 있는 정확한 비판력 등 모든 걸 가지신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 매력이 아닌,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춘 분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소설을 쓰실 수 있었겠다 하는 마음에, 1부를 읽으며 참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좋아했던 그때보다도 지금 작가님의 깊이를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3부 집필이 1부 집필 시작하신 이후로 10년이 흐른 시점인데, 3부 후반, 4부부터는 같은 분이시지만 작가님도 그 기간에 또 많이 성장하셨을 거란 느낌을 받습니다. 이문열 작가님의 삼국지를 읽을 때 역시도 1권부터 시작하여 10권까지의 흐름에서도 작가님 역시 또 성장하셨을 거란 느낌을 받았거든요. 수없이 많이 읽으며 채워 넣으시고, 전력을 다하셔서 글쓰기를 하시는 그분들의 삶은 그것 만으로도 성장하는 삶. 그 자체였겠다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봅니다.
오늘 후기에서는 김두만이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김두만은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면천된 김이평과 두만네 부부의 맏아들입니다.
그 8촌 갓난 할멈과 김서방할아버지는 끝까지 윤 씨 부인의 종으로 남으셨고, 윤 씨 부인은 갓난 할멈에 대한 보답으로 그분들의 제우답으로 금싸라기 땅을 두만의 동생 영만에게 물려주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준구가 다시 빼앗았지만요.) 두만네의 성품은 어질고 마음이 따듯하며, 동네 아낙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나 남의 험담을 모른 채 하고 어진 말로 중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냥 누가 봐도 괜찮은 사람. 그런 인품이었습니다.
김이평은 사람이 참 건실하고 한평생 성실히 일하며 살았지만, 조금은 약은 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인정하는 것은 그는 약아서 자신과 가족이 위험에 처할 일(조준구의 집을 쳐서 재물을 빼앗고 동학에 가담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자연스레 피했지만, 훗날 두고두고 젊은 시절에 최참판댁에 받은 은혜를 갚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가지며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으며, 두 부부 모두 흠잡을 데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이평은 큰아들 두만의 장래를 생각해, 그가 10대 시절에 동네 목수 윤보(김이평의 친구이자 당시 평사리 봉기 운동의 리더)가 서울로 일을 가는 시기에 아들을 딸려 보냅니다. 농사꾼의 삶이 너무 뻔하니.. 아들만이라도 기술 배워서 잘 살아보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서울에다가 떨어트려만 놔도 된다고 말을 하지요. 두만은 자기 밥 값은 충분히 하는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부모를 닮아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삶을 살진 않고 어떻게든 한몫은 톡톡히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모은 돈을 가지고 진주로 와서 정착을 합니다. 다시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 부모가 정해준.. 아비, 어미 잃은 머리가 유독 크고 키가 작으며.. 인물은 좀 별로였다 할 수 있는, 그렇지만 시보무 님 잘 모시고, 불평불만 없는 묵묵하고 너무나 착한 성격의 막딸이를 아내로 맺습니다. 물론 저는 이러한 부모가 맺어주는 결혼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혼례를 하고.. 서울에서부터 두만을 보고 따라 내려온 작은 처 서울댁을 데리고 삽니다.
김두만은 서울댁이 하는 비빔밥집이 너무 잘 되고, 그 바람에 술장사를 하다가 결국 사업이 커져서 양조장 사장을 하고 대리점들까지 두게 됩니다. 돈을 너무 잘 버니.. 지역 인사들까지 그를 대접하게 되고, 일본인 간부들하고도 왕래하고 그들을 접대하고 하며 자연스레 친일의 삶까지 살게 됩니다. 자녀들의 교육에 열중하게 되고 또 학교의 학부형회장직도 오래도록 맡게 됩니다.
참 희한합니다. 점점 일이 잘되면 잘 될수록, 그가 돈을 벌고 어울리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높으면 높아질수록 그는 같이 커가며 어울렸던 동네 친구들을 피하고, 점점 더 하여 증오하게 되고, 이유 없이 자신의 집안이 과거에 종으로 모셨던 최참판댁을 헐뜯습니다. 근본적인 자신의 뿌리에 대한 열등감을 주체하지 못해, 아무 피해를 주지 않은 그들을 혐오합니다. 거리를 두고, 증오하는 이유는 자신의 뿌리가 드러나는 것을 강력히 막으려는 심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로 누리는 자신의 모든 것, 자신을 뒤에서는 욕해도 앞에서는 우러러보는 자신을 누군가는 업수히 여길 것이라는 것. 그리고 살림이 피니 자식의 교육에, 자식의 혼사에도 욕심이 많은데 그 혼사가 근본이 밝혀지면 막히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 등이 있는 것입니다.
두만은 기술을 배우길 원했지만, 송충이 솔잎을 먹듯이 평사리에 남겨진 김이평과 두만네, 그리고 두만의 동생 영만은 묵묵히 농사를 짓습니다. 초기 두만이 목수일해서 벌었던 조그만 목돈으로 산 땅을 밑천으로 하여, 그들의 몸에 밴 근검성실로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땅을 늘려 갑니다.
혹시, 토지를 읽지 않으셨던 회원님, 읽으셨던 회원님들은 오랜만에 여기까지 다시 읽으신다면 그 이후 그들의 삶과 관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실지요?
그들의 관계는 전형적인 첫 계층상승자가 나왔던 집안이 겪는 아픔을 겪습니다.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회학자 중에 삐에르 부르디외가 있습니다.
저는 그런 통찰을 먼저 했던 천재들에 가슴이 뜁니다. 굉장히 똑똑한 분이셨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의 저서로 [구별 짓기] (상. 하권 :모든 계층은 자신들만의 아비투스를 갖는다. 당신의 어느 한면이 당신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엄청난 분량을 읽기 쉽게 정리해 놓은 책이 도리스 메르틴이 쓴 [아비투스]입니다.
그 [아비투스]를 읽어보신 분들은 많이 계실 것 같습니다.
'계층' '상류층'이라는 말이 불편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현대 사회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층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표현하자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닐 거란 생각도 합니다. 너무나 눈에 잘 보이는 느낌이 요즘은 더 듭니다.
김두만은 혀를 찰 정도로 인간적으로 화가 나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부모 형제까지는 아니어도, 부모가 짝지어준 첫 부인을 보잘것없이 생각해 마치 자신의 과거가 청산되지 못하는 증거물같이 여겨 증오합니다. 왜 죽어주지 않는가. 와 같은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지요. (글에서는 처음 혼사 당시에는 두만이도 그렇고 그럭저럭 그 혼사에 모두 불만이 없고, 비록 죽었지만 신부의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두만네 딸을 주지는 않을 정도의 분이셨다 하니, 모두들 서로가 잘하는 혼사라 했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건, 김두만이라는 단순히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굉장히 인품이 나쁜 사람으로 변한 사람인 한 사람이 아니고, 타고난 심성과 유전자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변천사가 이와 같은 사람 중에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인물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한 유형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요즘 세상의 크리에이터들 중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유형 중 하나가 '개천에서 용 난 사람'입니다.
때문에, 요즘은 그런 과거를 자신의 훈장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그러기 전에, 또는 자신이 그런 컨텐츠로 수입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상류층으로 옮겨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본래 배경과 뿌리를 훈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비투스 책에서 비치는 뉘앙스로 제가 해석한 것입니다.)
아마 그것의 정도는, 얼마나 자신이 올라간 그 상류 계층이, 대물림이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들이 노력으로 등판한 그 계층에서 이미.. 확률적으로 대물림으로 그것을 얻은 사람들이 훨씬 많이 존재하는 그 세계에서 아무리 돈이 있어도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는 문화와 교육에서 결국 그 뿌리가 드러나는 이질감으로 인해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 소외감을 [아비투스]에서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주변 배경(가족, 친구)과 자신의 배경이 다르다는 것에서 열등감과 자신을 온전히 오픈하지 못하는 불안을 느낍니다. 그 고통이 심해질수록 반대로 자신이 바꾸지 못하는 그 뿌리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외로움은 한쪽에서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세상에서 돈과 권력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들은, 원 가족, 원래 소속된 사람들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한쪽은 왜 이리 변했냐 할 것이고, 또 한쪽은 답답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서의 '성공'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지의 척도인 것인데, 자신을 이미 알지 않은, 처음 본 누구라도 자신이 신뢰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일명 이 사회에서 조금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중점으로 노력해야 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계층 상승자'들은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입니다.
그 관점으로 이야기하다 보면, 그것을 느끼지 못했거나..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명 '속물'로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그들의 간극을 만듭니다.
특히 집안에서 가장 첫 계층 상승자들에게 그 외의 원가족이 원하는 것은 '제발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예전처럼 우기 그냥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전처럼 큰 욕심 없이, 그냥 소소하게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지요. 저는 그것이 책에서 말할 정도로 전 세계에서 흔한 일이라는 것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여기서 김두만은 가난을 탈출하여 부자가 된 계층상승자가 겪는 뿌리에 대한 열등감, 감추고 싶은 결벽증, 그리고 가족과 더 이상 융화되지 못하는 이질감, 소외감을 느끼는 시대의 캐릭터였다 생각합니다.
요즘 세상에도 성공을 하는 남자들이 '트로피 와이프'라고 해서 새로운 자신의 등급(?)에 맞는 와이프를 바꾼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런 용어가 존재한다니까요. 그런 것을 보면 그런 심리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심리입니다. 아무리 잘 되어도.. 그 잘되기 위한 목적은 사랑하는 가족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기 위함일 것 같은데, 막상 그것을 이루고 함께 잘 사는 게 아닌, 가족을 바꿔치기한다는 것이 놀랍지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제가 그 상황을 안 가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흔히 잘 된 사람 모두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원래는 오늘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글이 길어져서 우선 하나로 줄였습니다.
다음 후기 때 나머지 이야기에 대해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이야기와는 별개로 요즘 우크라이나가 지도에서 없어지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젤렌스키가 불리한 입장에서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을 그렇게 진행하는 것에서 우려가 있었지만, 어찌 보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으로 누르는 전쟁을 몇 년 치르면서 극한에 달한 정신을 보는 듯하기도 했습니다. 전혀 이제는 협상의 법칙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았습니다. 트럼프의 성향상 말 안 들으면 지도에서 없어지는 걸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대응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우크라이나를 본보기로, 미국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미국에 밉보인다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보여주려 할 것 같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럽의 강국들이 일제히 성명과 회견을 통해 우크라이나와 젤렌스키를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이번일로 우크라이나가 지도에서 없어지거나, 그에 못지않게 초토화가 된다면 그것은 유럽의 현실이 되는 것이니까요. 트럼프가 상대 국가가 공산국 러시아임에도 불구하고 서방에 이렇게 할 수 있냐는 배신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도 그러하지만, 국제 정세도 여간 불안한 상황이 아닙니다. [토지]를 읽으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한 만행과 전쟁을 숭고한 희생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러시아와 현재의 트럼프가 있는 미국이 생각났습니다.
물론 저는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만, 근본적으로 리더의 이상주의가 얼마나 큰 희생을 몰고 오는지를 젤렌스키를 보면서도 느꼈고, 자존심, 존엄, 옳은 것을 모두가 몰라서 못 지키는 것이 아닌데, 좀 더 현실적으로 대처해 어떻게든 전쟁을 막았어야 한다는 생각을 초창기에는 했습니다. 러시아에 분노하지만.. 전쟁을 맞게 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너무나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국제법 등 자국의 안위를 위해 자금은 지원해 주지만, 전면에서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지 못하는 서방 강국들의 대처가 안타깝기도 했고요. 제 한 개인의 간절함이 미치진 못하겠지만.. 모쪼록 더 이상의 불행과 희생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요즘 매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모님 모시고 볼 일을 보고, 내일은 저희 볼일 을 보고.. 저희의 미래 삶을 준비하기 위해 남편과 함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또 이것도 행복이네요.
모두가 따듯한 봄을 맞이하듯이 마음도 그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
노트북님, 후기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글도 역시 가볍게 읽을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계층 상승까지는 아니더라도 성공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스스로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공감은 100%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게 변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여겼고, 나라면 올챙이 적 잊지 않을 것이다 생각했습니다ㅎ
아마 부러움 반 질투 반 뭐 이런 기분이 없었다고 말할 순 없겠네요 ^^
노트북님의 글을 읽고 난 뒤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되었고,
내가 봐왔던 시선이 아닌 이런 시각으로도 볼 수 있구나,
단편적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얽혀있는 것들이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살면서 학교든, 직장이든, 지역이든, 어떤 집단에 속하는 건 필수불가결한 일이죠.
그러다 보니 그 속에서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본인의 의사와는 다른 결정을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결국 시작은 그런 사소한 것부터 이지만
나중에 변질되어가는 것은 그 사람자체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계층 상승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변하는 사람들의 심리란 무엇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하고,
(그 자리에 가보지 못했지만)사람다움을 잃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도 들고,
초심을 잃지 않은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인지도 알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육아 방법에 정답이 없듯이
살아가는 방법에도 정답이 없고, 그들이 선택한 길이 단지 개인의 윤리적 문제라면 탓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요.
이런 어려운 후기 글이나 책을 읽을 때면 다소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나름의 해석을 하며 재미도 느끼고 타격감 있게 제 수준도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