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다 보니.. 서론 일기가 길어져, 책의 후기만 나누고 싶은 분들께서는 스크롤 내리셔서 아래 구분선 밑의 후기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이 책의 후기는 지금 나의 상황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서론을 일기처럼 써보고자 한다.
이 책은 책의 주인공인 '요조' 라는 남자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말년 시절의 사진을 보고 묘사하는 듯한 서문과,
요조 자신이 쓴 듯한 첫 번째 수기, 두 번째 수기, 세 번째 수기,
그리고 다시 서문을 쓴 사람이 왜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후기로 나뉜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지금 나는 마음이 아프다.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인 내 아이를 계속 떠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아이가 이 주인공 요조 같은 사람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 아이 자신이 아니라 단정할 순 없지만 아닌 것 처럼 보인다.)
내가 기억하는, 그리고 내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나의 그 해맑던(?) 웃음과 한없이 밝았던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내 삶에 중대한 변곡점은 결혼 이었다.
결혼 후 내가 느낀 사람에 대한 것, 삶에 대한 모든 것은 사실 다른 책으로 한 권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이후 다시 정말 중대한 변곡점은 임신과 출산 이었다.
나는 이 일로 많은 엄마들의 삶, 특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들의 아픔, 그리고 오롯이 아이만을 위해 삶을 셋팅하고 살아가는 엄마들의 희생과 사랑, 사회적 가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도 역시 다른 책 한권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로 '책을 쓰겠다.' 라는 의미 보다는 그냥 그만큼 할 말이 많아, 이 한편의 글에 찬조로 넣을 수 없다는 뜻에 가깝다.
(독서 후기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냥 속에 있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는 기쁨을 알게 되어서 더 '책을 쓰고 싶다.' 라고 표현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에 아주 가끔 아이를 간절히 기다렸던 나의 이야기를 쓰기도 했다.
나는 4년 4개월차의 아들을 두고 있다.
태어나서의 사고는 너무 끔찍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쓰는 것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 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내 아이를 걱정하게 될 까봐 그것 조차 두려웠다.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 사고를 낸 그 곳을 내 발로 찾아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끔찍하다.
더구나.. 그 사고가 그들의 잘못인 줄도 너무 늦게 안 나에 대해 스스로 화가나는 감정은 가끔 한밤중에 나를 너무나 괴롭게 한다. 나는 그 병원의 말을 믿었다. 너무나 바보같이. .엄마가 처음이어서, 아이가 이렇게 태어났고, 이건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는 말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고 였다는 것은 생후 6개월 후에.. 아무래도 이상해 찾았던 큰 병원을 통해서 알게 되었지만, 그 병원에서는 정황상은 그러하나, 그것이 그 당시의 일이었다고 그들은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당시에도 너무나 대부분의 시간을 우는 아이를 안고 하루 종일, 밤새 서성이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미 많이 지나고, 확보가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병원과 투쟁이 너무나 힘들 것을 알고 있어서 일을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아이가 외상의 흔적은 분명해 졌으나.. 아주 아주 예민하고, 그러면서도 사랑 표현에 대한 감정에는 매우 둔감한 뭔가 묘한? 특성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6개월이 지나서 어떠한 증명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병원을 다 뒤집어 놓을 만큼 심각한 무언가가 또 있는 것도 또 아니었다.
다만, 너무 예민하고 심각하게 먹지 않는 문제로 이미 링거들을 맞기 시작하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최대한 잘 보살피는게 먼저 였다. 나는 아이를 케어하는 그 것 외에는 더 이상 그 장거리의 병원과 다른 곳들을 오가며 공방을 벌일 에너지가 없었다. 남편 이야기를 하자면.. 신기할 정도로 나와 달라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 남편 역시 회사와 그런 아이를 함께 보살피는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남편만은 편히 재운다며.. 밤새도록 아이를 내가 데리고 따로 자고 서성이고 깨어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를 케어하다가 저녁 5~6시가 되어야 한끼를 먹기 시작했고 그 한끼로 24시간을 버틴 날도 너무나 많지만 말이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남편이 나나 나의 원 가족 누구라도 그 누구의 성향의 반의 반만 닮았어도 내가 그토록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고 이후의 상황부터 아이를 키우는 상황 모든것이다. 하지만 내가 아무말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고, 또 그것이 사실인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것이, 그 정도가 그 사람의 최선인 것이다. 24년 4월, 이 글을 쓰는 내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기 때문에 글로는 표현하기 두려웠던 이런 이야기를 써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를 가정 보육으로 돌리고 육체가 힘들다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정확히는 의지하고 함께 의논할 사람이 없어서 무척이나 힘들다. 배우자가 아이를 키움에 있어서 아이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서 함께 공부하고 대화하고 나누는 부부가 무척이나 부럽다. 어쨋든 지금 이 시점에 나는 그 점에서 심각하게 아쉬움을 느끼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또 오해할까봐 덧붙이자면 남편 역시 아이를 매우 사랑하며 정말 잘 놀아주는 아빠이다. 그것은 확실하다.
어쨋든 그 당시까지는 뭔가 이상한 마음에 불안하긴 했지만.. ㅜ 이정도의 문제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 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같은 것이 존재하는줄 몰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나는 나의 심경을 토로 하면서도 이로 인해 내 아이가 가진 어려움 그 이상의 문제로 비춰질까봐 항상 또 두렵다. 내 아이는 학습적 능력은 현재는 다소 낮아 보이지만, 또 어느 한 면에서는 참 감탄이 나올 만큼 똘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것이 언어적 능력이라 그런걸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유독 언어적 능력은 어릴때부터 무언가 불안한 그 마음을 불식 시킬 정도로 참 잘 발달했었다. 항상 같이 생활하거나, 함께 학습이나 수업을 해보지 않는다면 전혀 그 어려움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꼭 말해두고 싶다.)
항상 일을 사랑하고, 내가 하는 일에 의미 부여를 했었기 때문에 또 그 안에서 오는 성취도 컸었다.
그랬던 내가 이 아이를 두고서는 복직을 하는 것이 싫었다.
그냥 엄마로써는 너무나 아이가 더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남편과의 갭이 너무나 컸다. 남편은.. 너무나 신기하게도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관찰을 하거나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이 참 지금도 신기하다. 물론 항상 심각한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아산 병원, 내가 아는 교수님 누가 이야기를 했고, 검사지가 있어도 그것 조차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설명을 듣고 그 종이를 다시 보지도 않는다.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내가 보기엔 큰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그냥 어려서 그런 것 같은데.. 너무나 신기하다. 공부를 하고 안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이 육아에서도 느껴졌다.
그런 차이로 남편은 내가 복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 시댁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물론 내가 버는 돈은 적지 않았다. 세금도 많았지만, 세금을 다 내더라도.. 세 후 내가 번 돈을 3년만 차곡 차곡 모으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집을 현 시세로 살 수 있다. 그정도의 돈이니 남편의 뜻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남편이 버는 돈을 다 쓰면서도 내가 번 돈으로 재테크만 잘 해도 잘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이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이렇게 고통 스러워 하는데..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가정이 원만하게 가려면 합의가 필요하다. 결국 난 복직을 해버렸고, 성격상.. 돈을 받는 만큼, 그 이상은 해야지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또 다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오랫동안은 복직하고 정말 안간다고 아침마다 난리치고 몸싸움으로 완강히 저항하는 아이 등하원을 모두 내가 다 시켰다. 남편이 그렇게 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몇 달 후에는 남편도 둘 중 하나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일하고, 다시 새벽에는 아이때문에 괴로워 안자고 다른 삶을 위한 공부를 하고, 또 아이가 새벽마다 울어서 다시 밖에 다녀오고..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잠을 극도로 줄일 수 있었는지, 나 조차 신기하다. 내가 당시에 남편도 어느 정도 인정과 합의를 하면서 아이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삶을 셋팅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 기억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왜 그렇게 거부하는지 처음에는 몰랐다. 이 아이는 감각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그로 인해 계속 해서 발달 지연이 이어지며 점점 더 갭이 벌어졌던 것이다. 어린이집에는 아이가 왜 이렇게 어린이집을 거부하는지 항상 상담하면 너무나 잘 생활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어린이 집을 세 번 옮긴 것도 있지만, 세 군데 모두 그렇게 말했다. 작년 초에 이 문제로 아산 병원에서 처음 이야기를 듣고 많이 불안했지만, 아이가 아무리 해도 감각 통합과 놀이 치료를 또 극도로 싫어하는 것이었다. 울며 불며 어린이집 만큼 완강히 거부하며 너무나 갑갑하다는 말을 계속 했다. 아이를 돕고 싶었던 것인데 거부하는 곳에 가두는 느낌이 들어서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집도 지금 생각해보면.. 적응이 되어서가 아니고 거부하는데 무기력해 진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그런줄도 몰랐다는 내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운지 모른다.
결국 난 그만 뒀다. 이렇게 그만둘 줄 알았으면 아이만 계속 해서 볼 것을 많이 후회 했다. 그만 두기로 마음 먹고도 그만두지 못하고 이어가는 생활은 지옥 같았다. 남편은 아주 끝까지 다니기만 하면 된다며.. 그냥 그냥 다니기만 하면 된다고 나를 설득했었다. 내가 회사를 나가지 않기 한 달 전까지..
처음에는 아이와 함께 하며 나의 일도 할 수 있는 장기 플랜을 세웠다. 그것이 빛을 바라기 까지는 아주 작게는 5년, 대략 7~8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 그 안에도 계속 해서 계획이 있었고 납기가 있었지만, 분명 내게 아이의 패턴에 맞춰서 선택 할 수 있는 시간 배분의 자유가 생겼다는 이점이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 자체가 간절히 바라는 삶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의 반쪽을 포기하는 아픔이기도 했다. 나의 삶을 아는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컸고, 나는 그 때 까지도. .회사는 포기 했지만, 나의 자아와 성장욕구를 완전히 포기할 날이 올지는 몰랐던 것 같다. 그때 까지는 그것도 상당히 많이 포기했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결혼 후에 그 전까지는 해보지도 못했던 마음 비우기 연습을 끝도 없이 하고 있다. 정말 다 비우고 비웠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비울게 이렇게 많이 남아있었는줄 몰랐다.
직장과 나의 커리어를 포기했고, 아이를 어떻게 기르고 싶다. 라는 아이에 대한 많은 기대를 비웠다. 하지만 그 아이에 대한 기대를 비우는 것은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자식이라서, 내 자식이라서 처음부터 실망? 이런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부모가 되어 보니 이해 할 수 있는,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어떤 어이여도 다 상관 없고, 이 아이가 행복하고, 건강할 수 만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너무나 커졌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아이와의 놀이, 그런 것 다 말고 모두 다 놓고 이 아이가 원하는대로 쫓아 다니기만 했다. 보통 조카들이 놀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나는 조카들의 놀이에 익숙했던 것 같다. 책들을 읽으며, 부모의 사랑과 정성이 잘 못 되면 그것이 아이의 정서에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읽을 때마다 특히 이 아이의 성향을 생각해서인지 많이 와 닿았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며, 아이가 거부하거나 싫어하면 억지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것 조차 맞는 방향은 아니었다고 하니.. 나는 참 엄마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거구나. 싶다. 물론 아이가 일반 아이와는 좀 다른 기질과 성향이 있긴 하지만, 유독 강압적인 것을 원래가 싫어하는 내가 아이의 상황을 고려해서 무한히 자유를 준 것이 또 잘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무척이나 혼란스럽고 기준이 어렵게 느껴졌다.)
아이가 가진 어려움을 아주 크게 접하게 된 것은 오히려 그만두고 나서 였다. 그만두기 전에는 아이에게 엄마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고, 이 아이가 뭔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 만으로 나의 일을 자유롭게 하면서, 아이와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것이 었는데.. 회사라는 큰 걸 포기하고 생긴 시간과 에너지를 아이와 나의 새로운 일에 양분하면서 알게 된 것은 생각보다 아이에게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나는 그만 둔 것을 전혀 후회 하지 않는다. 그만 두는 것의 목적이 막연히 새로운 나의 일이나 꿈이었다면 이럴 거면 회사라도 다닐껄, 이었겠지만, 나의 모든 행위와 목적은 항상 아이에게 직결되어 있었다. 시간과 돈 모두..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만두고 아이를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현실조차 깨닫지 못햇을 거란 생각이 든다.
1,2,3월 동안 많이 아파서 거의 어린이집을 가지 못하고 가정 보육을 했다. 그냥 아픈게 아니고 정말 체온이 정상인 날보다.. 40도 넘는 고열인 날이 더 많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 그것만으로 정신이 없었다. 병원도 자주 가고, 응급실도 자주 가고, 약도 너무 많이 먹어서.. 이렇게 먹어도 괜찮나 싶을 정도로 먹었다. 그리고 3월에 아이와의 대화에서 나와 우리 부부 모두.. 운동이라도 시켜 보자. 라는걸 느끼고 여러가지 체험 수업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축구 라는 수업 하나를 정하고 매일 참관하는 부모로서 알게 되었다. 내 아이가 단체 수업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지.. 이전에 병원이나 센터에서 말로만 듣던 아이가 가진 어려움을 정말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내가 일을 하고, 그만두지 못하고, 또 다시 남편과 아이 모두 셋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탐색하며 보낸 모든 시간이 너무 헛되게 느껴졌다. 너무 너무 바보 같았다. 엄마가. 내가. 도대체 무엇이 중한지도 모르고 도대체 그 골든타임의 시간을 어디에 쏟은 것인지.. 미칠 것 같이 힘든 요즘이었다.
나의 꿈 (어차피 아이와의 미래를 꿈꾸며 설계한 나의 꿈이다.) 을 미루고, 포기하고 그런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제라도 미루더라도 나는 다시 꿈꾸고 나아갈 사람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골든 타임 2년을 이대로 흘려보낸다는 것은 평생 용서도 안되고 씻을 수도 없는 상처 같은 후회가 될 것 같다.
지금의 이 후회 만으로 족하다. 다시는. 시간이 지나고 그 때 아이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느낀 시점에 현실을 핑계 삼으며 어리섞게 보내고 싶지 않다. 나는 아이를 가정 보육 하기로 했고, 그간 계획했던 모든 것을 중단하기로 했다. 외주로 일을 이어갈까 했지만, 그렇다면 들인 돈이 있기 때문에, 외주로 일이 완성되면.. 다시 그 완성된 다음부터 달려야 한다. 7살까지 안되면, 8살까지도 이 삶을 이어가려고 하는 나에게는 그것 자체가 독이다. 치료 수업들을 병행해 가며 나머지 시간을 엄마의 사랑과 정성으로 아이와 함께 해보고 싶다.
감각 통합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은 감각이 너무 예민하기 때문에 시도를 많이 기피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경험이 부족해지는 악순환이 된다. 그래서 일반 교육 시설에서 하는 시퀀스는 따라가기 힘들다. 우리 아이는 아주 오랫동안 연필과 가위조차 거부했고, 계속 해서 집안을 돌아다니는 놀이만 했다. 손을 거의 쓰지 않았다. 소근육 발달이 느리고, 결국 대근육도 느리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이는 바깥 생활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회유해도 지금 이틀 연속 바깥도 나가지 못했다. 한번 나가면 꽃과 자연을 즐기는 아이지만 나가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먹는것도 모두 그렇다. 음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맛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고, 맛 조차 못보는 것이 문제다. 아예 입에 대려는 시도를 극도로 거부한다. 목이 너무 아파서, 배즙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커서 안다. 할머니께서 자기 먹이려고 직접 배즙을 만들어 오신걸 안다. 그래서 그걸 먹어야 한다. 그런데, 그 배즙 반의 반 컵을 마시는데 아침에는 1시간 30분, 저녁에는 1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까지 해서 배즙을 먹여야 하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엄마인 나는 너무나 잘 않다. 이 아이가 안먹겠다고 손사레 치는 것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먹일 수 없다는 것을. 다만, 그렇게 거부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오래 끈기를 같고 같이 기다려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는 그것조차 하지 않고, 먹는 것, 놀이, 모든 경험에서 그렇게 오래 끈기를 같고 기다리고 시간을 주지 않으면 이 아이는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계속 좁혀진다. 내가 가정 보육을 하는 이유는.. 어떤 큰 꿈, 교육에 대한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 그런것이 아니다.
어린이집, 유치원의 일상에서 주어지는 시간은 이 아이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엄마인 나는 안다. 이 아이는 훨씬 더 느리고 오랜 기다림의 일정에 맞춰서 아주 조금씩 경험하고, 그것이 쌓여서.. 아주 작게라도 별거 아니었다는 안도감과 함게 두려움이 없어져야 하는 아이라는 것을. 내가 부리는 욕심은, 이 아이도 세상을.. 나처럼,, 살아볼만 하고 재미있는 것이 무궁무진한 세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는 것. 그것 뿐이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뒤쳐지는 존재가 아닌, 나도 할 수 있다. 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를 낳고 비로소 내가 알게 된 것. 세상에는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 다시 한번 나를 지극히 작고 겸손하게 만드는 이 감정이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나와 세상 사람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다. 당장 내 자식의 어려움 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게된 지금도 완전히 공감하지 못할까봐 두렵다. 내가 아이가 가진 감정을 그대로 느끼지 못하고,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 만큼 아이를 잘 도울 수 없는 사람일까봐 두렵다.
요즘의 그런 심경을 가지고 이 책을 읽는 지금, 참 슬프고 두렵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이 책의 주인공 요조,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어쩌면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사람이었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위에 구구절절히 쓴 내 아이가 이 문제를 가겼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아이 뿐 아니라 세상에 어떠한 많은 배경, 어떠한 많은 뇌의 이유, 어떠한 많은 유전자적 이유 등으로 인해 모두가 각양 각색으로 살게 되고 다양한 성향을 가지게 되는데, 누구의 행동도 그 이면에 생각보다 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래서 사실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며, 거기에 누구 하나라도 진심으로 그런 사람과 함께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이 있게 된다면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해 줄 수 없는 나로서는 안타까움보다는 안도가 될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어떠한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누군가가 또 이렇게 함께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자리를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만으로 깊은 안도가 되는 그런 심정인 것이다. (내가 마음아프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삶이 우울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의 분위기와는 별개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은 무척 행복하게 보낸다. 가끔씩 튀어나오는 나의 자아에 대한 욕망을 누르는 것이 아주 가끔은 고통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들은 그런 말들이다.
내가 한 때 진취적이었다는 것, 강단있는 사람이었다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살리라는 말, 하던 것을 밀고 나가라는 말 들이다.
나는 진심으로 주변의 그런 말을 들을 때 놀랍다. 내가 진취적인 사람이었던가?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가? 이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재능이 무엇이었던가? 벌써 몇 달만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는것이나, 남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말하는 그 대화가 어색하고 놀랍다. 나는 그런 나를 벌써 잊은 것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가도.. 하루 종일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렇게 애를 쓰기도 하며 아이와 하루 종일 해본걸 생각하면 너무나 별게 없어서.. 나조차도 놀랄 때가 많다. 이전의 나는 시간대비 효율을 엄청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살아왔지만, 지금 보니 그렇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면 이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내가 같은 시간에 몰입하면 할 수있었던 것들을 아주 가끔은 순간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내가 아주 온전히, 모든걸 놓고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주기 위해 하늘이 이 시점에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나. 하는 생각도 한다. 나는 이토록 모든걸 놓고 아이 엄마로서의 삶을 아이 생후 1년 이후엔 살아본적이 없다. 하염 없이 꽃구경을 하고, 클레이를 만들고, 요리 준비와 요리를 하고, 책을 읽어주고.. 내일은 아이와 무엇을 할까?! 를 생각하며 진낸 적은 없었다. 항상 아이가 자고 나면 나의 일에 대한걸 챙기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내일은 아이와 무엇을 할가?! 이번주는? 다음주는? 하며 계속 해서 찾아보게 된다.
시간이 지나서 우리가 각자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시간에도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은 분명 황금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서론이 길었다. 내가 이금 이 시점에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고, 그래서 이런걸 느꼈다는걸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이제 여느 때의 방식대로 후기 글을 써보려고 한다.
이 책의 이 짧은 서문을 읽으면, 그냥 다자이 오사무는 천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 짧은 서문으로 이 주인공에 대해 소름끼칠 정도로 궁금하게끔 표현 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하네요.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면서도 너무 강렬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꼭 작가의 삶 이야기를 이 주인공 '요조'라는 인물에 투영시키고, 작가 자신이 그를 바라보는 제 3자가 되어 쓴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걸까요?
'공복'이라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배가 고파도 그걸 느끼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 수기에서는 요조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는데, 혹시 작가도 자폐 스펙트럼에 더하여, 우리 아이 처럼 감각 통합 문제를 겪었던건 아닐지? 생각되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밥을 안 먹으면 죽는다는 말은 저에게는 그저 듣기 싫은 위협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미신은 (지금까지도 저에게는 뭔가 미신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언제나 저에게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었습니다. 인간은 먹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일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만큼 저에게 난해하고 어렵고 협박 비슷하게 울리는 말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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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인 괴로움, 그저 밥만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해결되는 괴로움, 그러나 그 괴로움이야말로 제일 지독한 고통이며 제가 지니고 있는 열 개의 재난 따위는 상대도 안 될 만큼 처참한 아비지옥일지도 모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자살도 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고 정치를 논하며 절망도 하지 않고 좌절하지도 않고 살기 위한 투쟁을 잘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롭지 않은 게 아닐까? 그런 사람들은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확신하고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이 대목에서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에서 느껴지는 지식인들의 고뇌, 정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의 고찰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다자이 오사무의 이것이 몇 차원 더 높은 것처럼 느껴지고요.
밤에는 푹 자고 아침에는 상쾌할까? 어떤 꿈을 꿀까?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할까? 돈? 설마 그것만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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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특히 출근길 붐비는 인파속에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 출근 길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갈까..?! 도대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을까..?!
퇴사 고민을 많이 하는 시점에 그 생각을 특히 많이 했던 것 같네요.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라는 존재를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위에서 제가 쓴 몇 구절의 글들을 읽으면서 저는 '자폐' 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고차원적인 고민에 사람이 두렵고 무서워져 말을 잘 나누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러한 고차원적 고민으로 인해 서로의 감정과 고통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자폐' 인가 과연 그들이 '자폐' 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또한 주인공 요조는 누군가의 비난이나 가족의 꾸중을 듣고 말대꾸를 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말에서는, 제가 뭐라 하는 말에 발끈해서 저항하는 아이의 반응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혀 저항적이지 않고, 유독 선생님 말씀을 아주 잘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수업을 따라가든 못따라가든 별개로 어떤 지침에 대해서는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하지만, 집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대목을 읽을 때면, 과연 어떤 것이 아이 답고 아이에게 좋은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합니다. 뭐든 저항도 하고, 말대꾸도 하면서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아이가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참 소설이 제게 주는 이점은 사람, 삶에 대해서 다양한 각도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물으셨을때 저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을 못 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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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것을 싫다고 하지 못하고, 또 좋아하는 것도 뭔가를 훔치듯이 쭈뼛쭈뼛 전혀 즐기지 못하고, 그러고는 표현할 길 없는 공포에 몸부림 쳤습니다. 즉 저에게는 양자 택일하는 능력조차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저의 소위 '부끄럼 많은 생애'의 큰 원인이 된 성격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의사 표현도 분명한 편이고, 특히..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을 생각해서 싫은 것은 적당히 어떻게 자연스러울까를 고민할 때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거나 대답함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없는 편입니다.
위에서 말한 제 아이와는 기질 자체나 성향이 정 반대라고 해도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뭔가 대답이 느리고 한참 걸리다가 모르겠다고 말하는 아이가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냥 떠오르는 좋은 걸 말하면 될텐데 그게 왜 어려울까? 했었는데, 이런 글을 읽으니.. 더 심오한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이가 아이 답게 막 하고 싶은걸 말할 때도 많지만요.. ^^,,)
특히 첫 번째 수기의 요조와 같은 시기인 아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도 부모가 좋아할 만한 대답을 하는 요조를 보며 놀랍기도 했고, 부모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런 아이를 귀여워 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한번 우리는 이러지 않아야 할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를 마냥 기다리던 시기에는 아이만 제게 주신다면, 어떻게든 잘 키워 보겠다. 아이를 꼭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라고 다짐했던 저였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항상 어려움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생각에 최근에는 부모로서의 역할에 대해 유독 조심스럽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시기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글을 읽더라도 글 속에서 부모와 자식의 동상이몽에 대해 자식의 관점에서 쓴 글들을 보면 주의 깊게 받아들이게 되네요.
이 소설이 지금 제게 더 특별한건 아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다채로운 감정과 시선을 읽는 것이 유독 요즘 제게 의미 있는 이유는, 사람은 원래 자신이 경험한 만큼 느끼고 깨닫는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제 아이든, 세상이든.. 이런 모든 다양한 감정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은 아직 두 번째 수기를 읽는 중이어서 뒷 부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진 모르겠어요.)
인간에게 호소한다. 그런 수단에 저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 호소해도, 어머니한테 호소해도, 순경한테 호소해도,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 버리는게 고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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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머슴과 하녀들의 그 가증스러운 범죄조차 아무한테도 호소하지 않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불신 때문도 아니고, 또 기독교적 박애주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이 저 요조에게 신용이라는 껍질을 단단히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조차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끔 보이셨으니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아이가 그렇게 숱한 울음으로 제게 어린이집을 거부하며 고발했는데, 그 몸부림들이 전혀 신용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자포자기 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린이집이 무슨 사고를 칠만큼 나빴다는 뜻이 아니고 아이의 시선에서 이야기 한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제 아이의 거부보다, 오히려 처세에 능한 어린이집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상황이 그렇게 타협해야 했다 하더라도요..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 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꼭 이대목이 아니어도,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했던 작가 이상의 [날개]라는 작품이 많이 생각났습니다. [날개] 라는 소설 마지막에 옆구리가 간지러워 지며 돋은 날개가, 마침내 그 사내에게 자유를 주었을까요..?! 그 '자유'와 지금 이 소설에서 말하는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 에 대해 진정 두 작가가 같은 의미를 두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작가의 삶과 자살 시도, 마침내 자살로 끝내 생을 마감한 일이 더 그렇게 느껴지게 만드네요.
정말이지.. 이렇게 짧은 소설도 이리 쓰고 싶은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요즘 저의 상황과 심경까지 토로하느라 더 길어진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읽으실지도 모르니.. 글 앞부분으로 올라가, 책의 후기는 중간에 구분선 아래이니 거기서 부터 읽으시라는 이야기를 붙여놔야 겠습니다.
노트북 드림.
요즈엔 모순을 읽고 이어 인간 실격을 읽고 있습니다. 읽다가 노트북님의 후기는 어땠을지 궁금해서 들어와봤는데요. 저는 결혼도 안했고 아이도 없지만 노트북님 글만 읽어도 아이를 얼마나 걱정하고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노트북님이 노력하시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이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 본인을 투영한 주인공이 맞는 것 같아요. 처음 사랑했던 여자와 동반 자살을 시도한 내용에서 본인 이야기이구나 싶었습니다.. 또 남들보다 자아 성찰을 깊게 하고 보편적이지 않은 캐릭터다 보니 노트북님 말씀처럼 소설은 삶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해주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주말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