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알게된 동네 언니가 있었어요.
영어 회화 모임에서 알게된 언니였는데 제 관점에서 책을 참 많이 읽는 분이었어요.
아들이 원하는 대학에 붙고 그제야 편안한 마음에 2달동안 방에 들어박혀서 7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 부분에서 전 입을 다물지 못했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밥도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말하고 나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와 함께 자기만의 동굴로 들어가신거죠.
전 언제쯤 그런 경지에 올라설까 싶습니다. ㅋ
그 당시에는 전 그리 책을 많이 읽고 있지 않았지만 책에 대한 욕망만은 가득한 그런 때였기에 그언니의 책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지곤 했었습니다.
한국 소설 작가들을 비교해서 평을 하거나 유명한 책들 얘기를 할때는 넋을 놓고 들었던거 같아요.
그때 제가 요즘 무슨 책을 읽으시나요 하고 물으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있는데 너무 짜릿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후 전 그책을 찾아봤어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수가 없었죠. 어느 부분에서 짜릿하셨는지 감도 안왔죠.
하지만 그 짜릿함이 뭔지 너무 궁금했고 나도 언젠가는 그 짜릿함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습니다.
그후 저의 독서생활의 중간중간 전 제가 그 책을 이해할 정도가 되었을까 싶은 마음에 가끔씩 그책을 들춰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책을 이해하며 즐기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다른 부분에서 그 짜릿함이 뭔지 감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 언니와 같은 포인트는 아닐지라도 나만의 짜릿함을 갖게 된건 제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저의 행복은 그때부터였던거 같아요. ㅎ
하지만 여전히 제게는 어려운 책들이 참 많습니다.
대표적인 작가가 밀란 쿤데라였어요.
그의 책은 스토리로만 승부하는 그런 책이 아니었죠. 대충 읽으면 이게 무슨 재미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 그래서 자꾸 들춰보고 싶은 매력이 있었어요.
전 이런 책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자꾸 곱씹어야 그 맛을 음미할수 있는 그런 책 말이죠. 하지만 아직도 그매력을 온전하게 느끼기엔 저의 독력이 많이 모자람을 느낍니다.
이런책을 선호하는 이유는 생각이 깊어진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그래서 알고 싶은 마음이 마구 생기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입니다.
누가봐도 작가의 의도가 훤히 보이는 그런 책보다는 이게 무슨말이지?하는 느낌이 드는 책.
제가 왜 이런책에 꽂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저 좀더 깊이 생각했을 때 느껴지는 가볍지 않은 감정이 좋아서라고 말할수 있을거 같아요.
책장에 꽂혀있는 또 다른 책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이탈로 칼비노 전집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이런 책들은 아직 제가 정복하지 못한 책들입니다. 자기만의 방은 그 깊이에 책장이 잘 안 넘어가고 나머지 두 책은 문장이 어렵다기 보다 산만함이 보여서 읽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느낌도 앞부분만 봐서 그런것일수는 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읽어내리라 다짐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런데 이런책들이 제 책장에 꽂혀있는게 전 좋습니다. 아니 더 많은 정복하지 못한 책들을 모으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의 독력이 성장하는 모습을 스스로 느끼고 싶거든요.
우습지만 그렇습니다. ㅋ
'대화는 시간 따위가 아니라 정반대로 시간을 조직하고 시간을 지배하고 준수해야 할 자신의 법칙들을 부과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라고. 그가 발걸음을 빨리 하는 까닭은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이제 더 이상 바라지 않음을, 자신에게 지쳤고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으며, 스스로 기억의 그 간들거리는 작은 불꽃을 훅 불어 꺼버리고 싶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라고.'
'달리 말해서, 우리는 쾌락 안에서 쾌락을 위해 살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그 희망은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그 희망의 여린 빛이나마 존재하고 있는가?'
줄거리라고 말할것도 딱히 없는 책입니다. 등장인물의 행동에 주목하라는 뜻이겠죠.
결국 작가는 독자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이 책은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결코 그 흐름을 쫓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는 쿤데라의 의도적인 작법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틀에 맞게 흘러가는 구도를 깨고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줄거리에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책은 줄거리를 운운하는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작가가 일부러 그런 장치를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안의 등장인물을 통해 그들의 행동이 상징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찾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등장인물 중에 18세기 귀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뱅상이라는 인물처럼 여자를 유혹하는데 성급함을 보이지 않습니다. 쿤데라가 말하는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책 제목이 느림이라고 한데는 아마도 그런 느림의 미학이 쿤데라가 이 책에서 추구하고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 나온 인물들은 현대인의 자화상을 상징하고 있는듯합니다.
줄거리에 연연하지 않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캐릭터안에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전 소설을 읽을때 소설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쫓는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했을때의 충격과 희열. 그렇게 한발 떨어져 보게된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라는 인간을 알게되는 과정을 즐기는 듯 합니다.
소설을 재미로만 보지 않는 저의 독서 방식인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미만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예전에 한동안은 그런 책만 읽었던 시간도 있지만요)같은 책은 이제는 잘 선택하지 않습니다.
뭔가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알려줄것 같은 책, 나의 의식을 과감히 깨뜨려서 나의 우주를 더 넓게 펼쳐줄것만 같은 책.. 전 이런책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쿤데라 책을 좋아한다고 했지만 실상 깨달은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도 동시에 듭니다.
그저 뭔가가 있어보이는 책을 좋아했던 나의 지적 허영이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허영이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것일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을 계기로 조금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짧았지만 아니 짧았기에 좀 더 그의 메시지가 잘 보였던 책이었습니다.(책이 글자도 크고 짧아서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짧은책인데도 지금껏 책장에 두고만 있었던 책을 읽어냈다는 것에 만족스럽습니다.
그리고 쿤데라의 작법을 이제는 조금 이해할수 있을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욱 좋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한주를 보내고 또 회원님들과 도란도란 얘기할수 있는 시간이 와서 너무 즐거운 마음입니다.
모쪼록 남은 주말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ㅎ
딸기님^^ 안녕하세요. ^^
이번 한 주는 왜 그런지, 시간이 정말 많이 지난 느낌이 드네요,,
마치 지난 주말이 까마득한 이전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보낸 시간들은 여느 한 주와 다를바가 없었는데, 참 신기한 일입니다.
ㅎㅎ 요즘은 독서 후기도 후기지만, 딸기님의 그 독력 상승, 그리고 그런 것에서 오는 희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재밌기도 합니다. ㅎㅎ 눈이 반짝 반짝. 어떤 마음이실지 알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저는 한동안 저를 끌어올릴 뻔한 책들이 고전이었는데, [토지]를 읽으며 오래 쉬게 되었으니, 이제 그간 집에 사 놓은 몇몇 책을 읽고 나면 다시 고전읽기에 빠져 보려고 합니다.^^
저도 다시 딸기님처럼 그런 것을 느낀다면 좋겠습니다.
저도 쿤데라의 책을 정말 좋아합니다.
[토지]를 다 읽고, 쿤데라 책들을 하나 하나 읽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가졌지만, 그의 책을 읽기 전에 최대한 많이 다른 책들을 읽고 공부하고 난 후에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 읽기에 대한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쿤데라의 책을 하나하나 읽어보고 싶네요.
저도 이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딸기님게서 전해주시는 이야기에서 또 쿤데라의 그 대조적인 작법이 드러난 책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가벼움과 무거운, 빠름(성급함)과 느림 과 같이 항상 말하고자 하는 개념과 대조적인 설정을 넣고 그렇다고 소설에서 조차도 그 중 어느것을 더 편중되게 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양 극단의 모호함 속에서 독자가 자연히 그 철학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 그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전에 몇 번 말했던, '철학이 가면을 쓴다면 그게 바로 소설.' 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도 쿤데라의 작품을 읽고 나서 였습니다. 아무튼 너무 멋진 쿤데라 입니다. 항상 그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체코'에서 그의 잃었던 조국에 대한 아픔도 같이 느낄 수 있고요, 그 감정 만큼은 이광수의 책에서 느끼는 그런 감정과 똑같아서, 저는 그 두 지식인의 정서가 어느 한 부분에서는 같을 것이란 생각도 혼자 해봤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밀란 쿤데라의 책을 아주 오랜만에 딸기님을 통해서 들으니 넘 반가웠습니다.
참.. 쿤데라의 책은 소설책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주일에 한권 읽는 것이 엄청나게 에너지가 많이 들었던 기억입니다.
얇다고 하시지만, 이런 책을 한주안에 읽으시고, 후기까지 남겨주시는건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딸기님께서 스스로 느끼시는 그 책을 읽으시는 깊이와 독력이 달라지셨다는 것이 옆에서 함께하는 저도 느껴집니다.!
주말 아침 일어나자 마자 딸기님의 후기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곧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