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이번 주부터는 [진보와 빈곤]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런 류의 사회과학책들을 소개할 때마다 거의 매번 저자들을 천재라고 소개하게 되는 것 같네요.
이번에 소개해 드릴 헨리 조지 역시 그러합니다. 게다가 지금껏 제가 접한 모든 사회학자들 중에 가장 뜨거운 가슴을 가졌던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제가 모르는 분야마다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 수도 없이 많으시지요.
제가 몰랐던 것일 뿐. 알게 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저는 아주 조금 사회학자들의 책들을 보았지만, 볼 때 마다도 이런 천재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제 적성은 사회학자 쪽이었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유독 그런 쪽으로 호기심이 많고, 질문을 던지고 혼자서 답을 찾아가는 기쁨도 큽니다.
데이터 사이언스 쪽도 저랑 잘 맞는 것 같고요. (이제 와서 보면요,,!) 회사에서도 제 일에 관련된 일에 대한 데이터는 최대한 많이 확보해서 자유자재로 뿌려보며 새로운 걸 발견할 때 기쁨을 많이 느꼈는데, 그때는 제가 적성에 잘 맞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런 저의 성향을 알고, 시간을 돌려 대학을 다시 간다면 저는 심리학을 전공해서 사회학자의 길을 갔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그런 공부를 다시 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고요.
지금껏 읽어왔던 사회학자들은 그 명성에 걸맞게(?) 어려서부터 고등교육을 받고, 또 다방면의 고품격 문화생활을 하며 자랐던 학자들이 많았는데요. 그런 교육 과정과 당대의 석학들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대화하고 토론을 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학자들은 몹시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얼마나 사고가 크게 확장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헨리 조지는 제가 접한 그동안의 학자들과는 다르게 매우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학문을 했던 사람이 아니고, 점원으로도 일하고 선원으로 화물선에서 승선했던 사람입니다.
인쇄소에서는 식자공으로도 일하고요. 14세 때부터 그런 일 을 하다가 21세 때는 미국 서부에서 금광 사업을 하기도 했지만 실패하여 다시 식자공 생활을 했습니다.
결혼 후 [타임스]의 식자공으로 취직한 그는 글쓰기 능력을 인정받아 기자로 발탁되었고, 28살의 나이에는 편집장까지 하게 됩니다. 그 후 여러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자신이 직접 [샌프란시스코 데일리 이브닝 포스트]라는 신문을 창간해 4년간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것만 봐도 이 분이 가난한 환경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얼마나 타고난 신동이었는지 알겠는 부분입니다.
이후 우연히 업무차 뉴욕을 방문한 그는 그 엄청난 부의 도시에서의 빈부격차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젊은 헨리 조지는 깊은 실망, 분노, 당혹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돌아가고 남을 만한 자연의 혜택을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이 축복의 땅에서 왜 이처럼 생활조건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져야 하는가? 왜 저런 엄청난 부가 저런 심각하고 열악한 가난과 공존하는가? 왜 이처럼 풍성한 부를 자랑하는 사회에서 신체 튼튼한 남자가 일자리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얻지 못하는가? 왜 여자들은 배가 고파서 기절을 하고 어린아이들은 인생의 아침을 맞이하여 유아노동의 단조로운 바퀴를 계속 밝아 돌려야 하는가?
바로 거기, 대낮의 도심 한 거리에서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불타는 생각, 소명, 그리고 비전이었다.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맹세를 했다. 반드시 이 심각한 가난의 이유를 알아내고야 말리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런 비참한 가난과 호화로운 부의 축적이 공존하는 사태를 해결한느 방법을 알아내고야 말리라.
헨리 조지는 세상을 관찰하고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장 큰 자본으로 여겼던 '토지'와 토지 제대에 대해 관심을 갖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해 자꾸만 작아지는 노동자의 임금의 상대적 가치에 대해 주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 사실들에 대해 이상적인 토지 정책 (독점 철폐에 대한 주장)까지 정리한 48페이지짜리 짧은 책을 출간합니다. 1천 부가 발행되었으나, 곧 조지는 더 자세한 설명을 갖춘 책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로부터 6년이 흐른 뒤에 [진보와 빈곤]을 출간했습니다.
이 부피가 큰 책은 "산업 불황의 원인과, 부의 증가가 빈곤의 심화가 공존하는 현상에 대한 탐구."였고 그 해결책을 제시했다.
헨리 조지는 혼자 있던 한밤중에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완성되자, 무릎을 꿇고서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 그는 뉴욕 시의 거리에서 했던 맹세를 지켰고 그 이후는 이제 주님의 손에 맡길 따름이었다.
헨리 조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대부분의 출판사들은 이 책을 불온하다고 보았고, 모든 출판사가 팔리지 않거나 출판 비용을 건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저는 이제는 이전의 우리나라 같으면 불온서적이나 금서로 지정되었을 책들이 이타적인 천재들이 얼마나 큰 인류애를 가지고 깊은 고심 끝에 쓴 책들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받아왔던 사상교육에서는 많이 자유로워진 느낌이 듭니다. 중요한 것은 선입견이었던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토지의 사유제를 문제 삼고, 더 높은 토지 단일세를 주장한 그가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헨리조지는 사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의 삶이 힘들어질 때, 정치적으로 그런 포퓰리즘이 스며들기 쉽다는 것을 이미 잘 알 고 있던 것 같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1928년 2%대 지지율에서 1933년 30% 후반의 지지율을 얻었던 것처럼요.
저는 이제 겨우 서문과 문제 제기까지만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거의 책의 내용을 그대로 전해야 할 것처럼 제 생각과 일치하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책이 정말 좋아지는 경우는 2가지 인 것 같아요.
하나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움을 주는 경우. 제 머리에 도끼로 얼음 짱을 깨듯이 인식의 변화를 주는 경우고요. 또 하나는 지금 이 책처럼 기존의 저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경우. 아주 깊은 공감을 느낄 때입니다.
사실, 이 책은 목차부터 초반 서문 글들이 제가 지금껏 갈구하고 알게 되고, 그리하여 아주 가까운 동생이나 부모님께만 계속해서 이야기해주고 싶은 그런 내용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저처럼 생각하는 줄 알았어요.
너무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고, 사회나 경제에 저 정도는 누구라도 관심을 가지는 줄 알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정말 많은 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시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의아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은 다 다른 것인데요..)
저는 아주 이전부터 '누군가는 가난하고 누군가는 부자로 사는가?'
그것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특히 일을 그만둔 지 1년 반이 넘은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 것을 느낄 때면, 약간 고통스러운 감정에 일그러진 얼굴을, 뜨거운 여름에 그을리고 땀이 흐르는 얼굴을 외면하고 싶은 감정을 느낍니다. 마음이 괴로워서요..
더더욱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의 저의 생각은 그 이유가 '관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 하는 관념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그 작은 차이가 저점 살아갈수록 나이테가 불어나듯 원이 커지면서 엄청난 거리의 차이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관념을 깨어야 하는 것이죠.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모라도.. 자신의 그 틀을 자식에게 강요할 순 없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감히 이런 말을 하기는 민망하지만, 저는 헨리 조지의 글을 읽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그가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것, 그리고 가난한 집안에서 시작해서 그 가난을 실체를 잘 아는 것 자체가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살면서 제가 속한 어느 그룹에서는 무슨 이유라도 '좋겠다.'라는 말을 오히려 더 많이 듣고 살게 된 것 같지만.. 저는 그 가난의 실체를 잘 압니다. 다만 너무 어린 시절에 그것이 다 지나가서 저도 모르게 잊고 살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그 시절은 그랬구나 합니다. (물론 그때는 너무 행복해서 저희가 가난한 줄도 몰랐었지요.) 그리고 한 때는 아쉬웁이 없다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역시 우리는 넉넉한 게 아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유는 그 대가(부모님의 한 없는 노동.. 수면 부족의 오랜 세월들)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때는 모두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오히려 살아가면서 평범한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그런 저의 배경들로 인하여 저는 헨리 조지의 그 모든 고민과 감정들이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제가 고민하고 관찰했던 것. 제가 초점을 맞췄던 것들이 헨리 조지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너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초반이지만요.)
너무 민망하지만, 저의 꿈까지 생각하여 저는 헨리 조지의 1/1000의 정도 되는 미니어처가 된 기분입니다.
그래서 꼭 제 글인양 공감하며 읽게 됩니다.
원래는 막스 베버의 다른 책을 구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이 책이다!!' 싶어서 두 책 모두 사 왔습니다.
원래 이런 책이 소화가 어려워 느린데, 앞으로 시간 동안 이 책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래도록 '독서 중'으로 되어 있을 것 같네요. 책 또한 매우 두껍습니다..
(완독을 해야 후기를 쓰기 좋은 소설은 당분간은 못 읽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책을 만난 것 같아 몹시 기쁘네요.
지난주는 한 주간 몇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저희 고모께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이셨는데.. 너무 고통스러워하셨고, 나중엔 의식을 잃으셨지만.. 중간중간 몸을 떠시며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한 달 동안 금, 토, 일 고모의 간호를 맡으셨었거든요.
고모가 갑자기 급성 말기암 판정을 받으시고 나서 중간중간 고모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단 며칠만이라도 고모가 이전처럼 의식이 돌아오신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휠체어에 모시고라도 어디를 모시고 갈 수 있다면, 열일 제치고 달려갈 거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며칠 만이라도 고모와 여행을 너무너무 가고 싶었네요. 이미 제가 병원에 갔을 때는 의식을 잃으셨기 때문에.. 손을 잡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지 못하시는 상황이었습니다. 들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잡고 이야기를 했지만요..! 제가 너무 늦었다고.. 늦게 와서 죄송하다고요..
혼자 있을 때는 문득 고모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났습니다.
마지막 입관식 때 고모 얼굴을 만지니 너무 차가웠습니다. 신기할 정도로 여전히 피부는 고우셨습니다.
고모의 손녀딸이 "할머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하는데 눈물이 순간 더 솟구치도록 나왔습니다. 그 어린 손자 손녀 연년생을 주중에 내내 맡아서 키우시면서 그 당시 저를 챙기셨습니다. 잊을 수가 없네요.
언니가 은행을 다니셨는데, 언니가 업무 과중에 너무 피로하다고.. 혹시라도 업무 중에 실수할까 봐 잠을 편하게 자라고 손주 둘을 어린이집도 없던 시절이지만, 신생아 때부터 계속 고모가 아예 데리고 키우셨습니다. 주말만 토요일에 언니네가 와서 데려갔다가, 일요일 두고 다시 가고요.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대학생이던 저를 금요일마다 부르셨어요. 공부를 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정말 음식 솜씨 좋으신데 맛있는 음식. 특히 고기 음식들을 항상 해주셨고요. 항상 빨래를 직접 하지 말고 고모네 싸와서 편하게 다 개어진 걸 가져가라고 하셨어요,,! 여자 아이들은 항상 깔끔히 하고 다녀야 한다며 흰색이나 밝은 색 옷을 많이 입던 시절인데, 세탁기를 안 돌리시고 옷에 따라서 손빨래 다 해주시고,, 돌아가는 길에는 반찬을 6가지씩? 해서 다 싸주셨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너무 감사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저희 엄마만큼이나 고모 생각이 많이 났고 너무 애틋했네요. 어떻게 그렇게 아이 둘을 키우시면서 저를 그렇게 챙기실 수 있었을까. 그 생각만 생각하면 고모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마음이 아리고, 고모 생각이 나서 정말 연락을 자주 하며 지냈습니다. 해드리고 싶어서 뭐라도 챙기고 하면 맨날 받기만 할 수 있냐며 또 막 뭘 보내시고 그러면서 정말 딸과 엄마처럼 잘 지냈는데요.
고모가 돌아가실 때 가족들이 모두 인사를 나누는데, 고모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희생적인 삶을 사셨지요.. 저는 고모가 돌아가신 게 너무 가슴 아파서..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이제는 듭니다. ㅜ
장례식장에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저는 고모가 의식을 잃으시고 나서부터.. 그리고 장례식장에서, 그리고 장지에서 흙을 삽으로 푸는데.. 계속 고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고모가 귀가 잘 안 들린다는 말씀을 하시기 시작하셨었는데, 보청기를 사드리고 싶었어요. 자식들도 있지만 고모는 당연히 그런 거는 직접 알아서 하셔야 한다는 생각이셨고, 저랑 통화를 자주 하니 자연스럽게 말씀하셔서 제가 알아본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보청기가 제가 생각한 것 보다도 훨씬 비싸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비싸서 완전히 제가 사드리지도 못하지만, 나머지도 고모께도 부담되는 가격 일 것 같아서 알아보다가 일부가 정부 지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훨씬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걸 고모네 동네 행정복지센터에 신청하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때 하셨던 그 말씀이 정말 내내 생각이 났습니다.
나이 들어서 나라에 도움도 못되는데, 젊은 사람들이 힘들게 일해서 낸 세금을 내가 그렇게 축내면 되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죄스러운 느낌이 든다고요.
당시에도 뭔가 뜨거운 게 솟구쳤던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모는 평생 열심히 일하시며 딸 둘을 키우셨는데요..!
그리고 일을 하시지 않을 때도 (열심히 일하는 자식들이 일에 전념할 수 있게) 손주들 키우시고 두 딸 반찬, 김치 해주시며 그렇게 사셨는데, 그렇게 사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게 뭔가 너무 슬펐습니다.
누구나 누리는 복지라고 해도, 괜찮다며 고모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었네요..!
결국 고모는 그냥 보청기를 사셨습니다.
그때 고모 말씀이 이번에 정말 자주 생각이 났습니다.
고모께서는 직접 키우신 그 손주 남매 자랑을 저한테 많이 하셨었는데, 큰 손자가 운전면허 따서 고모랑 여동생을 데리고 제주도 여행을 시켜드리겠다고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했다고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하시며 마음이 너무 고맙고 대견하다고, 손녀딸도 할머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항상 그렇게 말했다고, 고모가 편찮으실 때는 직접 와서 자고 가면서 손녀딸이 간호해 드렸다고 이야기하며 자랑을 하셨었는데요..
삽으로 흙을 덮는데, 그 손자가 그렇게 울더라고요.. 자기가 약속을 못 지켰다고요.
너무 저도 가슴이 아파서 그 등을 계속 쓸어내렸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또 부모님의 남은 삶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은 삶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의 뜻을 존중하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가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올 초에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느낀 바지만, 평소에는 사는 것이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더라도..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면 사촌에 6촌까지 장지에 함께 하고, 되는 분들은 며칠 씩 함께 하고, 팀을 나눠서 미리 벌초도 해놓고 장지에서 비 오는 날 작업을 위해 다 펜스 쳐놓고, 상차림해서 기다리시는 분들. 다 너무 감사하고 든든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이게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한참 자기 삶이 바쁠 20대 남자애들까지 와서 일을 다 봐주니, 그렇게 고맙고 기특할 수 없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누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들 우러나오는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저만큼이나 다른 사촌 오빠들도 고모와 그런 추억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다 아무 소용없기도 하지만, 가시는 길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외롭지 않겠다 그런 말씀들을 하셨었습니다. ㅜㅜ 살아계실 때 더 많이 함께 하지 못한 게 아쉽고 이제는 정말 다 소용없지만요..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니 최대한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냥 미루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데 마음이 많이 무겁습니다.
제 아들이 이제 겨우 7살인데요.. 제가 너무 조급하게 시작했나. 2~3년 정도는 더 있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매번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또다시 시간이 지나고 아쉬워할 선택을 하는 것인지 두렵고 고민이 많이 됩니다.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서 너무 좋았는데, 제 인생의 시기를 생각해서 너무 빨리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에 벅차다가도 주변에서 그 시기에 아이에게만 전념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주시는데 무슨 맘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느껴져서 더 그렇습니다.
너무 어려운 문제이네요.
좀 더 지나보고요.
지난주 또 다른 일은 10Km가 47분대로 줄은 이야기입니다. 뛰다 보니 빨라져 있어서 죽어라 달리지 않았는데 얼떨결에 평균이 오른 느낌입니다. 1km대 평균 페이스가 4:46대로 줄었습니다.
꾸준히 달리기를 이어가겠지만, 런린이가 갑자기 풀마라톤을 3개월 남겨두고 등록하고 나서 이제는 즐기며 오래도록 가져가도 되겠다 하는 시기가 온 듯했습니다.
처음 몇 달은 적응기였지만, 희후님의 다른 댓글말씀처럼 지금부터는 러닝도 삶의 일부로 얇고 길게 끼워두고 가려고 합니다. 11월에 안전하게 풀 완주를 해보고 싶네요.
회원님들의 글을 보면 너무 반갑고 좋은데, 제가 모바일 버전으로 치면 오타가 많아서 조심슬운 부분이 있네요.
댓글을 바로바로 못 다는 게 아쉽습니다. 이해 부탁 드립니다.
그래도 PC에 앉아서 글을 쓸 때는 언제나 웃음 가득합니다.
글 여행님께서 한 번도 공백을 이렇게 두신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 연락을 주셨습니다.
저도 짐작은 했었는데, 개인적인 일이 생기셨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마음이 안정되시면 그때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시는 회원님들이 계실까 봐 남겨 둡니다.)
비가 와서 아쉬운 주말이지만,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노트북 드림.

노트북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트북님의 고모님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잘 느껴져 얼마나 마음이 안타깝고 애절하실지 짐작도 되지 않습니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시기를 바랩니다.
당분간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게 되실거라고 하셨을때 어떤 책을 가져 오실까 궁금했는데
진보와 빈곤이라니 제목 부터 흥미롭습니다.
작가의 글이 노트북님의 평소의 신념이나 생각과 많이 일치한다고 하시니
책을 읽는 내내 얼마나 즐거울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저는 평소 사회의 불합리나 불공정에 대해 원인을 생각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받아들일 때가 많아서 그런지
노트북님과 같은 생각을 가지신 분을 만나면 내가 참 소극적으로 세상을 바라봤구나 싶습니다.
어찌보면 어릴적 환경들이 저를 좀 무력하게 만든것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여하튼 책을 읽으시면서 앞으로 어떤 내용의 후기를 가져 오실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1Km 평균 페이스가 4분대 이시군요
7분대 초반인 저에게는 어마어마한 스피드로 느껴 집니다.
희후님도 노트북님 각자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시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습니다.
여기 공간은 나이와 성별을 떠나서 참 배울 모습이 많은 분들이 계신 곳이라 저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공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저도 글 여행님의 안부와 병원에 계신 아버님께 무슨일이 생기신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마음을 잘 추스르시고 언제라도 좋으니 다시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부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으셨었군요. 고모님에 대한 특별한 추억과 기억 얘기를 들으면서 저도 가슴이 뭉클하고 슬퍼졌습니다. 너무 열심히 살아오신 분이신데 나라에서 주는 복지 조차 마다하시는 그 마음은 뭘까 생각해봅니다.
그 마음의 바탕이 너무 선하신것이 느껴지면서 죽는 순간만은 편안하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무 아쉬움 마음마저 듭니다.
이럴땐 삶이 공평한게 맞을까 하는 의미없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정말 그곳에서 편안하게 계시길 바래봅니다.
저는 사회과학쪽의 책을 거의 안 읽었다고 봐도 무방할만큼 그쪽으로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관련 책을 쓰시는 분들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트북님 얘기에서 천재...운운하는 얘기를 들으며 정말 그정도의 말을 들을 정도로 훌륭하신 분들이 계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제야 말입니다.
제게 천재는 이과쪽과 창의적인 예술 쪽만 생각했던 터라 사회학 쪽에서는 어떤 측면을 보고 그렇게 훌륭하시다고 하나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골고루 책을 읽었어야 하는데 제가 너무 편중된 독서를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편중되었다는 것은 전부다 모른다는 말과 상통한다는 생각이기에 참 부끄럽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노트북님 같은 분이 이런 사실을 일깨워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독서를 하는 자세, 그리고 독서를 하는 목적에 대한 생각을 하며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두꺼운 책이고 천천히 읽어야하신다니 그렇게 하시라 응원해드리고 싶어요.
저도 이제는 음미하며 생각하는 책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동안 어려워서 묵혀두었던 책들을 다시금 펼쳐봐도 좋을거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었거든요.
지금 읽고 있는 전락도 그 비슷한 생각에서 고른 책이기도 하구요. 그래서 저도 한주 더 재독까지 하고 완독 후기를 쓰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엔 한강을 뛰어보려고 나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아침에 왠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말입니다.
런닝이 붐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뛰고 있었고 또 싸이클을 타고 있었어요.
저번엔 한낮에 한번 나갔더랬는데 그때는 아무도 없어서 왜이리 사람이 없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너무 덥더라구요. 저도 곧 들어왔었죠. ㅋ 더워서 주로 새벽이나 저녁의 선선한 시간에 러닝을 하는가 봅니다.
공원내 방송에서도 요즘 러닝하는 분들이 늘어나서 혼잡하니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서 운동을 하라는 멘트를 하더라구요.
러닝 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어요.
전 그 사이에서 허둥지둥대다가 들어왔는데 다음에는 좀 한적한 곳에서 뛰어봐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건강한 에너지와 젊음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노트북님은 속도를 단축시키며 뛰고 계시다니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 뿐입니다.
충분히 즐기시고 11월에 원하는 러닝을 완수하시길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