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연년세세 - 황정은
한주간 별일 없이 잘 지내셨죠? 이번주는 '연년세세'라는 책을 읽고 왔습니다.
독서모임을 하고나서는 SNS에 뜨는 피드를 보면 책에 관련된 것들이 눈에 자주 들어오곤 합니다 ㅎ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인지 검색하는 책마다 '대출불가'로 떠서 당황했었는데, '연년세세'가 '대출가능'하다고 나왔습니다 ^-^ 매주 책을 선택함에 있어서 '기준'이라는 것이 없이 단순 무식하게 고르다보니 스스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인연이 닿은 책이라 생각하고 읽고 있습니다.
책을 읽기 전, 제목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하여 찾아보았는데 '해마다, 매년'을 강조하여 뜻하는 말로 거듭하여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를 배경으로 아직 어린 아이였던 이순일이 이후 살면서 겪어온 인생을 그린 소설로 그녀의 가족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습니다.
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와중에 가족을 모두 잃어버리고 15살 때까지 할아버지손에 맡겨졌던 이순일은 길도 없는 산을 오르며 매년 할아버지의 묘를 찾아 왔지만, 이제는 일흔두살의 할머니가 되었고, 아픈 다리를 이끌고 더는 오지 못할 것 같아 파묘를 결정합니다.
외할아버지는 어린 이순일을 곁에 두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노인은 성품이 괴팍했고, 먹을 것이 부족하면 자신은 챙겨 먹어도 손녀가 굶는 것은 신경쓰지 않았고, 작은 어깨에 멍에를 이고 밭을 갈게 하였으며, 학교 수업 중에도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다양한 핑계를 대고 집으로 데리고 가기 일쑤였습니다.
"저거 하나 살았어."
가족들이 배추밭을 기어 월북할 당시 이순일의 나이는 5살, 그 어린아이 등에는 3살 동생이 업혀 있었기에 이순일은 결국 어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외할아버지 손에 맡겨진 것입니다.
"외조부는 그것이 네 탓이라거나 동생의 죽음이 네 탓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외조부가 저거 하나 남았다고 말할 때마다 이순일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신이 불에 타 사흘을 앓아 누워있는 동생을 보면서, 동생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맡았던 그 냄새와 들었던 그 아이의 숨쉬는 소리를 잊지 못하는 이순일의 그 마음이 어땠을까, 할아버지의 그 말이 어린 이순일에게 칼날처럼 들어와 박혔던 것 같았습니다.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혼자 안고 가야했던 그 죄책감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어렸던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것 같아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할아버지한테 이제 인사하라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라고 권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팠을 거라고, 언제나 다만 그거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둘째 딸 한세진과 동행하여 파묘를 끝내고 보인 이순일의 '웃는 얼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복잡했을 이순일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이순일의 나이 15살이던 해 '좋은 것'을 주겠다던 고모의 약속을 믿고 할아버지를 떠나 따라나선 그날부터 식모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고모네는 7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빨래와 식사 준비, 뒤처리만으로 할일이 넘쳐났고, 고모는 위험하다는 핑계로 외출을 자제시켰으며, 기본이 너무 없다며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옆집에 사는 순자를 알게 되었고, (이순일의 어린시절 이름'순자')이름이 똑같았던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때리면 벽 너머에 네가 있다는 걸 생각한다고 순자가 말한 적이 있었다. 더 때려봐 어디 죽여봐 내가 깩소리를 내면 '순자'가 듣는다 '순자'가 듣고 있다 듣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죽을 것 같다가도 무섭지 않고 이상하게 배짱이 생긴다고 말하던 순자."
부모가 있든, 없든 그녀들의 삶은 다르지 않았고,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짱'을 부릴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는 존재라, 서로에게 얼마나 의지가 되고 있는지 알수 있었습니다.
옆집 순자의 도움으로 이순일은 고모네에서 탈출을 하지만, 결국 순자가 어른들의 추궁에 지고 말았던 것인지, 찾아온 고모부의 손에 끌려 이순일은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순자는 그냥 서 있었어. 네가 왜 여기 있냐거나 미안하다거나 일이 어떻게 되었다거나, 말도 걸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단 말이야. 내가 순자의 뺨을 때렸어. 그 애는 울지도 않았다"
고모네서 탈출하여 잠깐의 희망을 보았던 이순일이 다시 끌려왔을 때의 그 좌절감과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싶으면서도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한 순자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기에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집들이 간격없이 붙어 살았고, 등불로 불을 밝혔던 때라 화재가 잦던 그때, 순식간에 일어난 불은 순자네, 고모네 할 것 없이 모두를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순자네는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고모네도 부산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고모네를 따라가는 대신 결혼을 택한 이순일은 시장 상인의 소개로 전쟁고아였던 한중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첫째 딸, 한영진은 장모 이순일에게 오르막길에서 주저없이 등을 내밀던 남편 김원상을 보며, '생각을 덜 하기 때문에 의식하지도, 과시하지도 않은 채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생각'을 '안간힘'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한영진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과 생각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인지하지만, 결코 밖으로 내보일 수 없는 것들을 마음속에 쌓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망가트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영진은 아이를 낳고 우울증이 심했던 것인지 출산을 계기로 이순일의 도움을 받게되고, 함께 살게되면서 이순일은 두 집 살림과 아이들을 돌보았습니다.
"내가 몇시에 퇴근하든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 기다렸어.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한영진은 맏이로서 제일 먼저 취직해 경제능력이 없던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에 보탬이 되었지만, 해외에 나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그 애'(막내아들 한만수)를 대하는 엄마의 모습에서 서운함을 느껴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첫째인지라 한영진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칭찬은 제가 더 많이 들었고, 야단은 동생이 더 많이 맞았지만, 자식이라는 위치에서 더 자유로울수 있었던 것은 동생이 아니었나 싶었기에 지금 제 첫째 아들에게는 그런 무거운 책임감을 지우지 않도록 애쓰고 있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걸 다하고 살 수는 없다"
"이순일도 그랬을 거라고 한영진은 생각했다. 살아보니 정말이지 그게 진리였다. 현명하고 덜 서글픈 쪽을 향한 진리."
아이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기도 한 문장을 읽으면서 '서글프다'는 말은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과의 공동생활을 염두에 두고 가르치는 부분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온전히 자신이라는 범주안에서 자신을 위한 선택을 앞두고 있다면 '서글픈'쪽은 선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은 모두 이순일과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를 떠나, 그저 내 자식이기에 하게 되는 걱정.
'눈 감는 그날까지 자식걱정'이라는 엄마의 말도 떠오르면서, 자신은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자식들에게 준다는 것이, 자신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이순일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도 되었습니다.
둘째 딸, 한세진과 함께 사는 룸메이트 하미영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한 기억을 통한 엄마에 대한 원망과 엄마가 그런 행동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을 그녀에게 방치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아직까지도 고통받고 있는 하미영은 어른이 되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마주하고 힘들어 합니다.
"아버지는 나더러 잊으래. 편해지려면 잊으래. 살아보니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며. 도저히 용서 할수 없다면, 잊어. 그것이 정말 비결이면 어쩌지."
기억이라는 것이 선택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그건 죽을때 까지 마음의 상처가 될 것 같습니다. '인생의 비결'이라는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잊는것 또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지, 그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게는 그런 아픈 기억이 아직은 없지만,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지금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글의 마지막에서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하미영은 주인공 나탈리의 남편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간 것을 용서할 틈도 없이 너무 바쁘게 흘러가는 나탈리의 삶을 그리면서 화해와 로맨스에 대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 내용의 영화라 마음에 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그것이 나탈리를 향해 다가오니까."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고, 원망하고, 미워하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든 부둥켜안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잊고 또는 발판삼아 함께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이여서 모든 내용을 적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마음에 남은 구절을 적는 것으로 만족해야했습니다. 처음 접한 작가님의 책이었는데 꽤 괜찮았고,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도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