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독서 후기 공유 모임
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후기를 올리는 시기가점점 늦어져서 죄송한 마음이 이를 길이 없지만, 오늘은 [앵무새 죽이기]의 완독 후기를 쓸 수 있어서 기쁜 마음도 있네요.
후기가 자꾸 늦어지는 이유는 9월부터는 정말 시간적 여유가 더 없어지네요..!
다행히 아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중 2~3가지만 빼고 모두 이제는 하기 싫어졌다 해서 아들의 의견도 존중할 겸 시간표를 조절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듭니다. 저의 수업 중에서도 요가와 P.T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달리기 시간도 대폭 줄였습니다. 아주 간단한 조깅 + 주말 장거리 런만 할 예정입니다.
요즘은 재작년 말 회사를 그만두고 작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가 멈췄던 것을 다시 시작해 보려고 준비 중입니다. 그때는 그것도 단념 같아서 그렇게 속이 상했는데, 사실 이렇게 빨리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보다 아이도 잘 지내고 제 건강도 빨리 회복된 느낌이라서요. 그러면서도 또다시 시작하면 얼마나 폐인 같은 삶을 한동안 살아야 할지를 알기 때문에 지금 시작하는 게 맞을지.. 기껏 회복되어 평범한 삶으로 가져다 놨는데 너무 조급 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제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요.
지금 이 시기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몇 년 더 지나면.. 말 그대로 '꿈'으로 영영 놔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들의 엄마로 남기보다는 저로 살고 싶거든요.
물론 끔찍이 사랑하고, 아이가 제 품을 떠날 그날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싶지만 그것은 아들에게 어떤 감정적 물질적 보상(보람)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토록 바라는 저희 둘의 삶의 완벽한 독립을 위한 것입니다.
아들과 제가 각자의 삶에 완전히 빠져 들어 충실히 살 그 언젠가를 기다리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거든요. 지금 이 시기를 그냥 보내버린다면.. 제가 원하지 않았던, 그냥 제 이름 석자는 명목상이고, 그냥 아들 엄마로 오랫동안 남게 될 것 같아서 그게 사실 좀 두렵습니다. 저도 모르게 은근.. 아들을 통해서 저의 어떤 것을 증명하거나 그런 기쁨을 느끼려고 들까 봐 그런 것이 두렵습니다. 제가 느끼는 성취는 온전히 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었으면 좋겠거든요. 아들은 아들이 선택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면 그걸로 되거든요. 절대 그걸 판단하는데 저의 기준이 들어가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나중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제 마음은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지금은 사전 작업으로 바쁘고, 다음 주부터는 우선 7개월간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아마도 한동안은 사회과학책들 위주로 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 챕터만 읽고도 후기를 쓸 수 있는 책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 하퍼 리 의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 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책은 제1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지난번 후기는 1부까지만 읽고 쓴 후기였습니다.
그런데 마무리를 하고 보니.. 이 책에서 제가 가장 감명받았던 부분은 1부였던 것 같습니다.
완독을 했는데도 1부 후기가 결국 제가 느끼는 메인이란 느낌이 드네요.
이 책은 어느 꼬마 소녀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있었던 일을 성인이 되어 회상하는 듯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저는 꼭 주인공 스카웃(별명, 정식 이름 : 루이즈 핀치)이 작가 하퍼리 님이 자신을 투영시켜서 자서전처럼 썼다는 느낌이 듭니다. 실제 주인공의 아버지처럼 하퍼리의 아버지도 변호사 이자, 주 의회 의원을 역임하신 것까지 똑같습니다. 재판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하퍼리도 한때 대학원에서 법률 공부를 했었고요. 하퍼 리도 실제 1남 3녀 중 막내였고, 소설에서도 하퍼 리는 오빠 잼과 남매로 나옵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극 중 스카웃의 남자 친구 딜의 역할을 했던 하퍼 리의 어린 시절 남자친구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네요. 은근 하퍼 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 속에서 스카웃의 남자 친구 딜은 스카우트에게 이미 청혼을 해놓은 상태였고, 방학 때마다 이모네 집에 머물면서 스카우트, 잼 남매와 놀다가 돌아가면 스카웃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너뿐이라는 둥. 돈을 많이 벌면 바로 청혼할 테니 결혼하자는 둥 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셋이 함께 있을 때는 오빠 잼이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재빨리 와서 스카웃의 볼에 뽀뽀를 하고 가곤 합니다. 그런 모습들이 꼭 밝지 만은 않은 (그렇다고 또 그렇게 우울하지도 않은) 소설을 읽으며 환하게 웃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딜의 역할이 소설에서 엄청 중요하다 볼 순 없지만, 매력적인 존재로 나옵니다.
그리고 딜이 이전에 말씀드렸던 마을에서 실체와 다르게 오해를 받고 살았던 부 래들리를 아이들과 연결시켜 준 역할을 했다고 생각이 드네요.
앵무새 죽이기'는 비록 책은 1960년에 처음 출간 되었지만,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입니다. 아무래도 작가님이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작업을 했고, 몇 번의 편집 과정을 통해 출간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공황 시절은 같은 일자리를 두고 백인과 흑인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인종차별의 골이 더 깊어졌던 시기라고 하네요.
지난번 후기에서 잼과 스카웃 남매, 그리고 딜이 동네에 몇 십 년째 괴담만 가지고 나타나지 않는 부 래들리 아저씨를 밖으로 끌어내려는 이야기와 그리고 거의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하는 당시 흑인보다 나은 건 오로지 피부색 하나였던 밥 유얼이라는 남자와 그의 딸 메이엘라 유얼의 거짓 신고와 증언으로 백인 여성을 강간하려는 자로 사형선고를 받은 톰 로빈슨을 변호하는 사건으로 전개가 됩니다.
이 이야기까지가 이미 1부 후기에서 나왔던 내용이고, 그 이후에도 이것으로 이어지고 마무리가 됩니다.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가 흑인애인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그 인종차별 심하던 시절의 남부 진역에서 흑인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된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이 일을 외면한다면, 다시는 너희들(자녀들)에게 아버지의 말을 들으라는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희후님께서 아주 오래전 이 책을 읽으시고, 핀치 변호사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자고. 그런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셨다고 했는데, 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부모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재판 과정과 그 외 일상에서 핀치 변호사는 놀랍도록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그리고 양심적이고 따듯한 사람이었습니다. 톰 로빈슨을 강간협의로 기소했지만, 실제로는 아이들은 일 년에 한 번 입학식 외에는 학교를 가지 않으며, 집안에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왜 굳이 다른 아이들까지 학교에 보내야 하냐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해충에 감염되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면서 살지만 양심조차 없고 거의 고립되어 살아가지만, 너무나 비열한 밥 유얼이라는 사람의 집안사람들이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된 톰 로빈슨을 모함하여 자신의 죄의 증거를 말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평생 친구조차 없고, 집안에서 학대를 받으며 노동을 해오던 밥 유얼의 큰 딸 메이엘라 유얼이 당시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백인 여성이 선량한 가정이 있는 흑인을 유혹했던 것입니다. (키스가 너무 궁금하지만 아무도 (백인들은) 내게 키스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깜둥아(책의 표현) 내게 키스해줘 하며 뒤에서 끌어안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흑인은 전혀 그녀에게 동정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고,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흑인이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에 도망칩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밥 유얼에게 메리 유얼은 심한 구타를 당하지만, 결국 그 둘은 선량한 밥 유얼에게 백인 강간죄를 뒤집어 씌운 것입니다.
왜냐면 이제 톰 로빈슨은 그들에게 치욕적인 기억을 매일 상기시켜 주는 인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런 치욕감을 없애려고 선량한 사람을 모함하여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계속 그렇게 증언하는 그들입니다.
재판 과정에서 핀치 변호사는 나긋나긋한 질문들로 당시 구타의 흔적들 (메이엘라의 오른쪽 눈의 멍)은 왼손잡이인 밥 유얼의 구타의 흔적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게 해 주고, 또한 밥 유얼이 가진 불구를 드러내며 그는 그런 일을 벌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구타를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단순한 재판 스킬이라기보다는 그의 모든 면에서 인격이 느껴지는 그런 침착함과 선을 넘지 않는 매너가 느껴집니다. 부모상이 아니어도, 닮고 싶은 인간상이지요. 읽으면서 제가 오랫동안 느꼈던 희호님의 이미지와도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재판과정을 본 배심원이라면 누구나 양심적인 판결을 할 거라 기대했지만, 그들은 결국.. 알겠지만, 그래도 백인과 흑인의 재판에서 흑인의 손을 들어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느꼈는지, 결정에는 다른 재판과 다르게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국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는 듯이 백인 편을 들어줍니다.
하지만 그 이후 밥 유얼은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줄 알았겠지만, '네 편을 들어주지만, 이번을 계기로 네가 어떤 인간인진 확실히 알았어.' 같은 취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앙심을 품고 그는 핀치 변호사를 공공연히 죽인다고 협박했지만, 그럴 위인도 못되고 비열하게 술을 잔뜩 마시고 그의 두 자녀 잼과 스카웃(주인공)을 할로윈 파티 이후 돌아가는 길에 덮쳐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스카웃은 할러윈 행사 때 입었던 양계장 철조망으로 햄의 철망을 묘사했던 의상을 입었기 때문에 휘두른 칼날을 피할 수 있었고, 오빠 잼은 아이들이 밥 유얼인 줄 모르고 자신들을 놀래키러 온 친구로 착각해 매우 큰 소리로 질러댔던 소리를 듣고 찾아왔던 부 래들리에 의해 구조됩니다. 그 과정에서 잼의 한쪽 팔은 심하게 부서졌고 밥 유얼은 자신의 칼에 넘어지며 찔려 죽게 됩니다.
부 래들리는 부상과 함께 정신을 잃은 잼을 끌고 핀치 집안으로 데려다줍니다.
그리고 처음 본 부 래들리를 스카웃은 직감적으로 그를 알아봅니다. '아저씨'라고 말하지요. 손도 잡아주고요. 부 래들리는 소문 같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비록 몇십 년째 햇볕을 쐬지 못해 놀랍도록 창백하고 볼이 페이고 기침을 많이 하는 남자였지만요. 그는 그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몇 년 전 부 래들리의 집 앞 나무 구멍에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넣어주며 아이들과 교감을 시도했던 것이 그라는 것이 소설 끝에서 확실해졌습니다. (1부에서 그의 형 네이선 래들리에 의해 그 구멍은 시멘트로 막혔었지만요.)
그 사고가 있었던 그날 밤, 핀치 변호사는 자신의 아들 어린 잼이 밥 유얼을 칼로 찔러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맨 처음에는요. 그래서 그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의 칼에 엎어지며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동네 보안관에게 어떤 마음으로 그래주는지 알겠지만, 나는 내 아이들의 출발이 그런 모습이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속임수로 그 아이들의 죄를 덮어주고, 돈으로 그 아이들을 구제해 준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그 두 아이들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말할 수 없으며, 그래서 그 아이들을 잃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아이들에게도 자신밖에 없는데(엄마는 아주 일찍 돌아가셨으니까요.) 그 아이들 역시 자신(아빠)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540여 페이지가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이라, 정말 주옥같은 대사들을 모두 옮겨 놓을 순 없습니다.
그렇게 하자면.. 너무 많아서, 제가 그냥 책을 보지 않고 제 머릿속에 있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핀치 변호사는 재판의 마지막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고 말합니다. 시작부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타고난 재주가 모두 다 다른 사람들, 하지만 그런 우리 모두가 정말 평등한 때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법'이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 배심원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준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던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게 된 톰 로빈슨은 거의 자포자기합니다.
그리고 핀치 변호사님께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하지만, 핀치 변호사는 항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톰 로빈슨은 교도소에서 한쪽 팔을 쓰지도 못하면서 빠르게 벽을 향해 달려가고, 그 과정에서 17발의 총탄을 맞고 즉사합니다. 아마도 톰 로빈슨은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읽는 내내 왜 이런 내용의 책의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 였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스토리상 가늠하기도 힘든 아주 짤막한 '앵무새'가 등장하는 말이 있으면 주목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딱총을 선물해 준 핀치 변호사는 아이들에게 다른 건 쏴도 되지만, 앵무새는 쏘면 안 된다고 우연히 말하게 됩니다. 왜 앵무새를 쏘면 안 되냐는 말에 핀치 변호사님은 '앵무새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고 즐겁게 해 주지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 착한 새.'라고 말합니다.
그것만으로는 그때 까지는 저는 무언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이후 밥 유얼이 그런 소동을 일으키고 죽은 그날,
"스카웃, 유얼 씨는 자기 칼 위로 넘어졌어. 이해할 수 있겠니?"
"물론이죠, 아빠. 전 이해할 수 있어요. 테이트(보안관) 아저씨 말이 맞아요."
"이해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글쎄.. 말하자면 앵무새를 쏴 죽이는 것과 같은 것이죠?"
라고 합니다.
저는 소설의 거의 끝의 머리의 이 대화가 무언가.. 책 제목이 왜 앵무새 죽이기 인지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기하게도 아무리 생각하고 앞뒤를 읽어도.. 밥 유얼 씨를 그 선량한 앵무새에 비유한 건지? 잘 와닿지가 않았습니다.
그동안은 소설을 읽으면, 떠오르는 것이 있고,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라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 제가 생각한 것이 맞는지 찾아보는 기쁨이 있었는데, 대부분 작품 해설보다는 작가와 그의 배경에 대해서 자주 찾아봤었는데요.
이번에는 유독 꼭꼭 눌러가며 읽고, 그래도 모르겠어서 전후로.. 아니면 제가 책을 읽다 표시한 부분들을 다시 훑어봐도 잘 예측이 되지 않아서, 결국 책 제목의 뜻을 검색해 봤습니다.
그랬더니 "앵무새를 죽이는 것은 무고하고 순수한 사람을 해치는 행위에 비유된 것이라고 하네요.
마치 흑인 남성 톰 로빈슨이 억울한 누명을 쓴 재판과 같은 사회 부조리를 말하는 것이라 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참 짐작이나 가늠이 힘들었던 것이 알베흐 꺄뮈의 [이방인]에서 빛의 의미였습니다.
저는 그것이 의외로 '자유'를 상징할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 그에 대한 해석들을 찾아봐도 당시에는 딱히 그렇다! 제 생각과 같든, 같지 않든 무언가 확 와닿는 글들이 없었는데, 이번 소설은 쉬워서 그런지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실제로 위의 짧은 대화 말고는 책에서 앵무새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런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책을 읽게 되니, 대화 하나하나 더 집중하고 읽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유레카!처럼 소설을 읽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그 소설의 의미,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그런 게 저는 너무 좋거든요. 이번에도 그걸 기대했던 것 같았지만, 제 센스로 눈치채기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흑인을 차별하고, 여성을 차별하는 독실한 크리스천들이 당연한 듯하는 말이지만, 실제는 인종차별, 불평등, 양심과 거리가 먼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스카웃,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좋은 대사가 많지만, 요즘 제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보며 생각하는 말이 있어 적어 봅니다.
겉모습 만으로는, 그리고 아무 특징 없어 보였던 누군가라도 한 단계, 두 단계라도 더 알아가게 되면 모두가 자신의 삶에 진심이고 얼마나 그 안에서 정성으로 삶을 채워 나가는지 알게 됩니다. 그런 걸 알게 되고 느껴질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 애틋하게 느껴지네요.
"아빠의 말이 정말 옳았습니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이 정말로 한 편의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인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인생은 아름다워] 같은 영화 마지막에 느껴지는 표현 하기는 힘들지만 애틋하고 뭉클하고 잔잔한 감동이 계속 이어지네요.
(스토리는 많이 다르지만요.)
후기가 늦어졌지만 그래도 이왕 늦은 김에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그냥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니까요.
덕분에 너무 좋은 책을 읽었습니다. 평점은 4.5점입니다.
저는 정말 좋았지만, 지금껏 만났던 수많은 좋은 책, 멋진 책들에 비해 이 책이 유독 그렇게 까지 찬사를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에 대한 찬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비교가 안 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양귀자 선생님의 [모순]에 대한 열광이 어떤 것인지 너무 궁금해서 책을 읽었는데, 분명 저도 좋았고 재밌게 읽었지만, 왜 이 책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인지? 의아한 그런 느낌이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태껏 책을 칭찬해 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반전같이 느껴지지만,
저는 이 책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책이기도 하지만, 이 책만이 받을 찬사는 아닌 것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최종 평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도 오히려 제가 5점을 주었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데미안은 너무 좋은 책이지만, 제가 이해를 다 못할 만큼 어렵다 하여 4점을 준 사람입니다. 얼마나 기준이 모호한지 알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이제는 데미안을 5점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자주 떠오른 책도 별로 없으니까요. 저는 정말 살면서 왜 헤세가 그런 고민을 했었는지, 왜 헤세가 그런 글을 썼었는지 이해가 간다고 느껴질 때가 정말 많고, 자주 떠오릅니다.)
이 책 역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픈 책인데요. 시간이 지나고 제가 이 책의 평점을 다시 5점이라 말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국 그래놓고.. 제목을 쓰면서, 이런 책을 4.5점이라고..?! 하며 '5점 만점 5점'을 쓰게 되네요.)
최근 몇 편의 독서 후기는 마치는데 무언가 아쉽습니다.
이전 같으면 제가 책 중간중간 표시하고 메모한걸 모두 옮겨 보려고 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책의 분량도 분량이지만 그냥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느낌으로 간추려서 이야기하니까요.
무언가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라도 제 후기만 보고서도 제가 그때 무얼 느꼈는지 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최근 몇 편이 그렇게까지 못 옮겨놓은 느낌이 들어서요.
또 그러자니 후기가 한없이 길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고요.
그렇다고 소설은 유독 완독 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간 후기를 쓰기는 애매한 장르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모두 즐거운 한 주 되세요..!
노트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