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며칠째 폭우가 쏟아지면서 가슴 아픈 뉴스들이 나오고 있네요..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더 이상 피해가 없길 바랄 뿐입니다.
이번 주 후기는 어제까지 고민이 되었지만, [군중 심리]에 대해 쓰지 않고, 지난주 글여행님의 후기에서 말씀하셨던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에 대해 쓰려고 합니다.
저는 이광수의 소설들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광수가 일본의 나쓰메 소세키와 견주어진다고 하니 너무 궁금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책을 바로 살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 주 남편 지인분께 선물할 책을 2회에 걸쳐 주문하게 되면서, 마지막에 한 권만 시키기 미안해 함께 주문할 책으로 [도련님]과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주문했습니다.
어제 도착해서 읽었네요. 너무 재밌는 소설입니다.
참고로 [군중 심리]에 대한 후기를 또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그래도 쓸 수도 있겠지만요. 이유는 참 아이러니한 것이 개개인만 보면 보석 같고, 제가 존경하고, 제가 사랑하는 그런 많은 사람들도 한꺼번에 군중으로 몰아서 이야기하게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요. 단지 제가 다녔던 회사에서 만의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그곳에는 아직도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남아 있고, 제가 존재를 모르지만 여전히 그런 보석 같은 사람도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세상의 아이와 엄마들 역시 저와 똑같이 자신의 아이에게 맞는 길을 선택해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분들일 텐데, 모두가 어느 순간 획일적으로 느껴진다는 뜻에서 그 모든 사람을 또 군중으로 묶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아서요. 물론 그 두 가지 사례 말고 사실 정말로 군중 심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지만요. 자본주의라는 아주 큰 틀에 대해서 느낀 바를 말하고 싶었고, 그것의 아주 작은 시작이 사실 주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자니.. 또 제 맘과는 다르게 (노출은 얼마 안 되지만 아마도 읽는 사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것이라 생각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글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잘 못쓰겠는 그런 심정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관찰자로 있어서 더 저 스스로를 군중과 분리된 개인으로 느끼지만, 저 또한 이 사회에서 분리될 수 없는 군중인데 제가 무엇을 더 많이 느낀 양 쓰는 글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정말 누군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지만, 아들에게도 지금 당장은 사실 그대로 말하기 힘드니.. 나중에 엄마가 그 시절 그런 걸 느꼈다고 기다렸다 말해야 될 정도라서 더 글을 바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그걸 몰랐다가 [군중 심리]라는 책을 읽고 깨닫게 된 게 아니고, 그것을 혼자서 깨닫고 심각하게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들어왔고, 귀스타브 르 봉은 정치 현상을 중심으로 이 글을 썼고, 저는 정치와 경제 두 가지를 하나로 보고 생각한 것이지만 어찌 되었거나 제가 느낀 바를 후기에 담아 전달하기에 적합한 책은 맞습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치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는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각각 똑같이 오류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건 제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더 많이 알게 되고 고민하게 되면 생각이 어떻게 수정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저는 그 두 가지의 문제를 모두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아는 한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 생각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기 때문에 꼭 지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누가 그것을 해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제 [도련님] 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독서 후기 모임을 하면서 좋은 점은 정말 많은 분들께 얻는 배움의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지난주는 글여행님 덕분에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알게 되었고요. 왜 인지 저는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읽으면서 혹시나? 다자이 오사무와 비슷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광수와 견주어진다는 작가이고, 또 제가 좋아하는 다자이 오사무와 왜인지 비슷할 것 같다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에 너무 끌리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도련님]은 작가가 실제로 영문학을 전공하고 나서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가 폐결핵을 앓으면서 신경쇠약 증세를 보였고, 그리하여 시코쿠(일본 열도의 4개 주요 섬 중 가장 작고 인구가 적은 지역)라는 작은 섬동네의 중학교 교사로 부임된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합니다.
갓 대학을 졸업한 23살? 젊은 수학 선생님인 주인공이 불합리, 부조리함을 겪으며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라는 식으로 솔직한 감정 표현들과 실제로 그것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는 (갈 수 있는) 젊은 피의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이런 부조리함은 곧 이런 못 배워 먹은 학생들(부임된 남자 중학교의 학생들)이 커서 생겨나는 것이라며 분개하는 장면, 그러니까 신임 교사로서 학생들과 기존 세력인 선생님들 양쪽 모두에게 느끼는 회의감을 표현한 소설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친구 하나가 생각이 났는데요. 회사 친구입니다. 제가 신입사원 때 저희 팀 인턴으로 와서 어찌 보면 후배인데 나이가 동갑이라 친구로 지낸 사이입니다. 저희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데 서로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친구의 성향을 전혀 모르고.. (처음에는 말을 안 하고 인상만으로 봤을 때는 매우 순둥하고 모범생 같은 얼굴이었거든요) 인턴과 선배로서의 사이로 각 잡고 대했더라면, 한동안 이 친구의 사이다 같은 표현도 듣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런 사이다 같은 표현의 대상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지금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언제나 제게 대리 만족을 주는 친구였습니다. ㅎㅎ
정말 속이 부글부글 하고, '정말 이 사람은 인간 자체가 너무 못됐다. 별로다.' 하는 그런 윗사람들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게 (저희끼리지만) 쌍욕을 날려주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하면 사이다처럼 느껴지고, 아니면 너무 웃기고, 전혀 불량하다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도 저희들끼리만의 작은 회식자리에서 상사들의 험담이긴 한데. 그때는 그런 것이 또 스트레스 해소였습니다. 그때는 그 자리에 있는 친구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고, 누구라도 상대를 두고 그런 표현을 하는 것을 상상을 잘 못했던 시절입니다. (물론 지금도 사람을 두고 그런 욕이 속으로라도 나오지는 않지만요.) 저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동생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런 말을 정말 정확히 집어서 어떤 것이 그렇게 못된 것인지 제대로 욕을 날려주니 그렇게 시원하고 재밌더라고요. 꼭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주인공 '도련님'의 이름이 정확히 뭐였는지는 책에서 언급이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의도적으로 안 쓴 건지, 제가 놓친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주인공은 집에서 일했던 늙은 가정부 기요의 보살핌을 받습니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주인공 '도련님'의 말썽쟁이 행태를 싫어해서였는지 형만을 편애하고 돈이나 학용품 살 돈도 잘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 아버지 마저 학생 때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형은 아버지의 유산을 다 팔아 정리하고 '도련님'에게는 딱 3년 정도 공부할 수 있는 돈만 주고 떠납니다. 오히려 친 형은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나오고요. 기요만큼은 '도련님'을 끝까지 믿고 사랑하는데 도련님도 잠시 도쿄를 떠나 중학교 선생님 일을 하면서도 기요 생각을 하고 많이 그리워합니다. 저는 왜 이 둘의 이야기에서 [자기 앞의 생]에서 주인공 모모와 로자 아주머니가 생각이 나던지요..! 그리고 얼마 전 치악산님께서 공유해주셨던 [라일라]에서의 달과 라일라가 떠올랐고요.
소설의 주가 아니지만 작가가 굳이 기요라는 인물을 넣은 것이 궁금했고, 작가의 생에서 어떤 인물이 '기요'였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작가의 어머니는 소설과 비슷한 시기쯤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람이 혈연과는 관계없이 경험으로 평생을 지탱할 이런 사랑을 안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부모 자식 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랑과 모성애란 그런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경험이 그러한 것일 뿐,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느꼈던 그런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사이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친엄마가 아닌데.. 하며 감동받는 이야기가 있다지만, 그들에게는 '피'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연보를 보면, 5남 3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가문의 서생이었던 시오바라 쇼노스케라는 인물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 부분의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8세가 되던 해에 양아버지의 외도로 인해 양부모가 이혼하고 재혼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었다고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친부와 양부의 대립으로 호적 정리가 되지 못하다가, 친부 쪽으로 복적 되었다고 합니다. '기요'라는 인물이 실제로 있었을지, 그의 양모를 두고 쓴 것일지 알 수 있는 흔적들은 제가 잘 못 찾겠네요.
이 소설을 읽으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쓰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요즘의 MZ 세대 같은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시대라 하더라도 학교의 선생님이라면 수업이 끝나도 교무실 자리에서 지켰다가 제 시간이 되면 퇴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일 것 같은데, '도련님'은 불합리하게 느낍니다. 그리고 항상 그것에 대한 반감으로 '수업이 끝났더라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3시에 퇴근을 하였다.'라는 식으로 일과를 표현하며 그 불합리를 토로합니다.
첫 부임날 교장, 교감 선생님부터 거기 있던 모든 교사에 대한 첫인상으로 별명을 짓는데 재치가 넘칩니다. 특히 임명장을 한분 한분 보여주며 인사를 하라는 장면에서 그냥 교무실 입구에 며칠 붙여놓으면 될 것을 이 더운 날.. 하나하나 보여주며 자기소개를 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라던가 그 시절에도 역시 젊은 사람들은 이런 구태를 한심하게 여겼고, 똑같이 반감을 가졌구나 싶었습니다.
거의 모든 소설에서 느끼는 공통점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세대차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시대가 바뀐 것이 아니고, 언제나 젊은 사람은 합리성을 추구하고, 언제나 기성세대는 격식(예의, 자신들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이 젊었을 때는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이 한심해 보이고, 허례허식 같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의 입장이 되니 다시 또 인정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심리 같은 것이지요. 대부분이 자기 기준에서 생각을 하게 될 테니까요.
정말이지 120년 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요즘의 세대를 보는 것처럼 신선했습니다.
특히 교장선생님께서 의례 당연하게 새로 부임된 교사에게 하는 조언 같은 것을 듣고,
'그렇게 잘난 사람이 월급 40엔 받고 이런 촌구석까지 왜 오겠냐? 인간이 다 거기서 거기지....
... 그렇게 어려운 자격을 갖춰야만 교사가 될 수 있다면 사람을 고용하기 전에 말을 했어야지..'
와 같은 솔직하고 폭소할만한 표현이 계속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참 재밌었던 것은 그 책에서 묘사하는 각각의 교사들의 인간상이 제가 회사생활하면서 보았던 인간상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이지 누구라도 공감할만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저도 사실 회사 생활하면서..
'내가 아무리 윗사람이라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이런 것까지 감지 덕지하며 감동받은 모습을 보이려고 회사를 다니는 건 아니야..! 그러니 제발 나를 (너 같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줘,,! 이렇게 해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 이 XXX야!!' 하는 마음이 드는 인간 유형도 있었습니다.
그냥 존재 자체가 너무 화가 나고 회사를 위해서 이런 인간들은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유형인데, 이런 표현을 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을 읽어서 그런지 용기가 나서 써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사이다 같은 건 그런 추잡스러운 인간이 학교와 나라를 위해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들에게 '도련님'은 실제로 사이다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이 손해 볼 짓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젊은 사람이 가진 '패기'인 것이지요. 손해 봐도 별 상관없는... 언제든 짐 싸서 떠나버리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시간이 많고, 또 여기에 들인 것은 짧은 그런 젊은 사람.
그런 와중에도 그것에 맞춰서 살 수밖에 없는 가장들도 있겠고요..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함께 그 무리에 짓는 사람 그냥 조용히 사는 사람. 힘들지만 그 와중에도 '도련님' 만큼은 아니어도 지킬 건 지키면서 사는 사람들 다양하게 있겠지요.
책을 읽으면서 왜 '도련님'은 불합리하다고 말하고 하는 것을 우리는(저는) 당연하다 생각하고, 묵묵히 티 내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윗분이 말씀하시면 흡수하듯 받아들여야 하고 참고 고분고분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런 것들은 기성세대가 교육으로 강요한 자신들이 원하는 인재상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따지자면 기성세대이거나 거기로 가고 있는데도요. 마음만은 젊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제 와서 욕구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련님'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데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을 써놨습니다 특별히 강력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고 시골학교라는 특수성 때문에 오히려 작은 동네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차지하고 유지하려고 치졸하고 교활하게 꾀를 내는 인물들에게 자존심을 내주고 타협하지 않고, 측은한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얻지 않고, 가슴 아파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런 상황에서 교감의 계략에 빠져 폭행 사건에 가담한 것처럼 뒤집어쓴 상황에서 마지막 복수를 해주고 신물 나는 그곳을 빨리 떠나는 이야기로 끝이 납니다.
흔히들 도시 사람들보다 이런 작은 시골마을이 더 사람 사는 곳 같고 정겨울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을 읽어보니.. 이 사람들에게는 외부로의 연결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쫓아내고 패권(?)을 장악하고 하는 자신들의 세상이 전부이기 때문에 훨씬 소문에 민감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을 이용하고, 평생 그 안에서 꾀를 내며 사는 사람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작고 한가해서 일어나는 일인 것일 수도 있겠네요.
실제 그렇다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실제로 영문학을 오래 공부했고, 영어 교사를 했지만 소설에서 주인공은 물리학을 전공했고 수학 교사로 나옵니다. 자전적 소설이라 말하지만 읽는 사람들이 완전 자기 일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오묘히 상황을 수정하고, 인물 설정을 다시 하는 것도 능력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헤르만 헤세의 책들에서 헤세는 항상 자기 자신을 여러 인물에 나누어서 투영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각 소설마다 최소 2~3인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1차원적으로 읽는다면 주인공에 초점이 맞춰진 스토리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이 헤세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헤세가 그런 의도로 쓴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항상 아쉽습니다. 작가와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요. 특히 저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으면서도 그런 걸 많이 느꼈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읽고 보니 결론적으로 이광수가 나쓰메 소세키에 못 미친다는 평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물론 저에게는 아직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이 남아 있고, 그의 작품들이 더 많이 남아 있지만요.
이광수는 한국적 정서를 잘 녹인 조선 말기 3대 천재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시인으로 따지면 정서는 김소월과 윤동주를 합친 듯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이광수가 나쓰메 소세키에 못 미친다는 평은.. 혹시나 그에 대한 반감을 가지신 분들의 평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만큼 저 개인적으로는 문학적으로 만큼은 이광수가 이 분께 못 미친다는 것이 비록 한 권이지만 조금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과연 글여행님께서 나중에 이광수의 책을 읽으신다면, 어떻게 평을 내리실까 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정말 책을 읽는 내내 나쓰메 소세키 역시 왜 사랑받는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은 천재 작가라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이광수와는 스타일 자체는 너무 다르지만요. 개인적으로는 다자이 오사무에게서 느끼는 그런 천재적 느낌, 해학적 재치가 많이 느껴져 너무 좋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다자이 오사무 모두 일본인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천재 작가이기 때문에, 문득 이것이 일본인들의 정서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치 저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책들을 읽으면, 이것이 미국인의 감성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요.
물론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 훨씬 어둡고 침울하다고 느끼실 수도 있지만, 거의 자서전 같은 자전적 소설 (등장인물들의 이름까지 비슷하다)로 평가받는 [인간 실격]에서도 저는 그의 해학적 성향을 많이 느꼈거든요. 소설을 읽으면 다자이 오사무 자체가 실제로 무력함의 끝판왕일 것 같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품을 폄하한 상대에게 화가 나서 공개적으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반박한 사례도 있다고 나옵니다. 그것으로 그가 완전히 무력한 인간상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생각하니 실제로 무력한 인간이었을 거라 믿게 만든 그가 더 천재같이 느껴졌습니다. 뒤이어 같이 수록된 [직소]라는 소설에서 그의 천재성이 더 보였다고 느껴집니다.
[직소]를 쓴 다자이 오사무는 마치 제 느낌을 표현하자면..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 스파이더맨이 악당들 앞에서 너무 쫄고 무서워하면서 살려달라고 몸을 비비 꼬면서 애원하다가 그것이 조롱이었다는 듯 바로 거미줄을 쏴버리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그만큼 엄살을 떨지만 자신이 뛰어난 것도 알았을 것 같은데, 결정적으로 다자이 오사무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몇 번의 자살 시도를 하다가 정말 자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나쓰메 소세키와의 다른 점 같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죽음을 '희'로 묘사했지만,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에서도 이런 걸로 목숨을 끊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말하니까요.
저는 그 둘이 너무 비슷해서, 둘이 비슷한 연대의 작가였는지, 아니면 둘 중 한 명이 나머지 한 명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일지 궁금했습니다.
나쓰메는 1867~1916년 사람이고, 다자이는 1909~ 1948년 사람입니다.
나쓰메가 사망한 시점에 다자이는 꼬마였겠네요.
다자이 오사무는 소설 [인간 실격]에서 나쓰메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언급합니다.
책 두 번째 수기에서 주인공 요조에게 관심 있는 여성이 재밌는 책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을 책장에서 골라 주었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밀란 쿤데라가 자신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시작에서 톨스토이에 대한 오마주로 [안나 까레리나]를 등장시킨 것과 같은 감정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찾아봤지만, 나쓰메에 대한 오마주의 표현이라고 작가가 직접 밝힌 기록은 못 찾았습니다.
그 둘이 정 반대인 면도 있고, 같은 면이 있다고 느껴지는 것 중에 먼저 공통으로 느껴지는 일본인의 정서인가 하는 것은 유독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하이! 하이!" 거리는 일본인들에게 실제로 이들의 소설이 주는 솔직한 감정에 대한 표현이 마치 제가 어린 시절에 회사 친구에게서 느꼈던 그런 대리 만족이었던 것일까. 였고,
둘이 완전히 다른 점은 아마도 나쓰메가 활동하던 시기는 일본이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며 제국주의적 야망을 본격화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기세 등등 하고 시원한 나쓰메의 정서가 그 시대의 정서와 더 비슷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실제로 [도련님] 소설에서도 사람들의 술자리 대화에서 '청일 조약'이 언급되기도 하니까요.
(시모노세키 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평화 조약으로, 청일전쟁(1894-1895)의 종결을 의미합니다. 이 조약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일본이 대만과 펑후 제도를 할양받으며, 청나라에 2억 냥의 배상금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반면 다자이 오사무는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것처럼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구제하지 못하고 비극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당시 사람들이 느끼는 그 무력감. 그런 정서가 다자이 오사무의 그 정서가 당시의 사회 정서에 잘 맞았던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희 부모님도 나라가 가난하고 서러웠던 시기, 거기에 더하여 부모님께 전해 듣거나 부모님의 성장 배경에서 어떠한 양식으로라도 영향을 받았을 부모님께 자라났던 저희 세대까지의 정서와 저희 자식세대의 사회적 정서가 매우 다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희 아들이 박경리 선생님이나 이광수의 책들로 그 시절 사람들의 삶을 가늠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정도로 마음 아파할 순 있겠지만, 그것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의 이미지는 아닐 수 있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그 시대에서 가장 공감받는 대표정인 정서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한국에는 너무 참신한 작가와 작품들이 나오고 있기도 하고요.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너무 많아서 다 옮기지도 못했지만, 또 후기가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왜 쓰다 보면 이렇게 길어지는 걸까요..!
아무리 독서 후기 모임이라지만 죄송한 마음도 듭니다.
책의 내용은 제 밑줄과 별표를 보며 나중에 다시 본다 하지만, 지금 느꼈던 점들은 시간이 지나면 휘발될 것 같다는 생각에 떠오르는 대로 담아두게 되는 것 같습니다.
회원님들의 답글과 후기를 읽고 당장 같이 글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이제야 할 수 있겠네요.
비 피해가 더는 없어야 할 텐데요..
모두 별 탈 없는 한 주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