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이번 주는 개인적으로 몸이 몹시 힘든 주였습니다. 체력이 많이 딸리고 힘들다고 느껴졌었는데, 결국 목감기로 시작해 감기 몸살이 제대로 왔었네요. 하필 이런 주에 남편이 하루는 팀빌딩, 하루는 골프 라운딩으로 부재하니 몸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계속해서 끝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는 너무나 재밌는 책입니다.
정말 좋은 책인데.. 왜 이리 읽는 게 더딜까?! 재미가 없는 책일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보통 재밌는 책은 단숨에 읽으니까요,,^^,,) 이 책은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책입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다 의미 심장하고 소중해 천천히 읽고 생각하게 되는 책이거든요,,! 물론 [생각에 관한 생각]은 그래도 큰 벽돌책이라 용서가 되지만, 저는 이 책을 매일 아주 열심히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완독 했습니다. ^^: (저의 두 번째 인생책인 그 책도 제게는 그렇게 인상적이었네요,,!)
이번주는 제5장 도피의 메커니즘(p.150~224)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1장부터 사람을 매료시켜 지난 후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1~4장은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느낌입니다.
그 지식이 방대하고 깊이가 있어서 같은 내용인 것 같지만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5장을 읽고 나니, 드디어 이 책의 진짜 매력은 5장부터 시작하는 느낌입니다. ^^:!
그만큼 재밌게 읽었습니다.
알맹이로 가득한 이 책을 제가 간단하게 요약한다는 게 참 어렵지만, 이 장의 제목처럼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메커니즘을 간단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권위주의
인간이 개체적 자아에 결여된 힘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의 개체적 자아의 독립성을 포기하고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그 자신의 자아를 융합시킨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원초적 유대를 대신할 '2차적 유대'를 추구하는 경향인데요, 여기서 놀라웠던 사실은 이 2차적 유대를 강하게 원하는 사람이 권위적인 사람인 것인데, 그 대상에게 권위적이거나 함부로 대하지만, 그 대상이 파괴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자신의 그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 대상에게 실제로는 더 많이 의지하고 부재를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대상을 사랑해서 유대하거나 그를 위해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자신에게 복종해 주기 때문에 그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우리가 아는 '피학적' 충동의 형태는 열등감과 무력감, 허무감이고 그와 반대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이 '가학적' 충동의 형태인데, 현상은 극과 극이나, 이 권위주의 적인 가학적 현상 역시 그 근원은 열등감과 무력감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파시즘의 인간적 토대인 성격 구조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정말 책을 알수록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웠습니다.
2. 파괴성
위에서의 도피의 메커니즘은 결국 개인은 외부 세계의 압도적인 힘에 비해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포기하고 외부 세계와 더 많이 유대하고 흡수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파괴성도 역시 참을 수 없는 개인의 무력감과 외로움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내 밖에 있는 세계를 파괴하면, 그 세계와 비교하여 내가 무력하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바깥 세계를 없애는 데 성공하면 나는 혼자 고립된 상태로 남겠지만, 그때의 고독은 화려한 고독으로, 그 안에 있으면 내 밖에 있는 사물들의 압도적인 힘도 나를 분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그 압도적인 힘에 으스러지는 것을 피하려는 마지막 시도, 거의 필사적인 시도입니다. 막상 상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겉모습은 동일해 보이겠지만, 가학증은 대상과 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파괴성은 대상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가학성과 파괴성의 차이가 명쾌하게 설명되어 흥미로웠습니다.
또 하나, 이런 고독하고 무력한 개인은 감각적. 감정적. 지적 잠재력의 실현에서 방해를 받는데, 이런 내적 장애는 종교개혁 시대 이후에 중산층의 종교와 관습에 빠르게 퍼진, 쾌락과 행복에 대한 문화적 금기에 의해 증대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금욕을 추구했는지, 제가 지난 후기와 댓글에서 말씀드렸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랑, 행복감 까지도 주를 잊은 채 누리는 죄인처럼 치부하는 (항상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대목에서나, 아니면 제가 목격했던 그 대상의 신앙이 그러했는지..) 그런 현상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의 내용으로 인해 상기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도, 충분히 이 삶과 자연의 여유로움을 추구하고 누릴 권리가 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조소의 대상이 되는 여유나 부리는 그'여유'가 되고 있는 것인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모든 자본주의의 현상들이 인류 발전을 위해 어디까지는 필요하지만, 어디부터는 강박이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왜 인류가 발전이 되어야 하나? 원주민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도 있을 텐데,,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지극히 개인적인 척도 이겠지만요,!
적어도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살아보고자 했던 그 자유로운 삶을 더 저만의 세계에 몰입하며 누려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3. 자동인형적 순응
앞에서 말한 권위주의는 무력한 개인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포기하는 대신 그 열등감을 극복해 줄 대상을 찾아 유대하려는 행위이고, 파괴성은 그 힘에 짓눌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자동인형적 순응은 개인은 자기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문화적 유형이 그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사회에서 정상인 대다수가 발견하는 해결책이기도 하고요,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회화'가 이 영역일 것입니다.
.. 따라서 그는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타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과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그와 더불어 외로움과 무력함을 두려워하는 의식도 달라진다....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포기하고 자동인형이 되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수백만명의 다른 자동인형과 똑같기 때문에, 더 이상 고독과 불안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치르는 대가는 비싸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다.
제5장은 모든 내용이 참 흥미롭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지만, 특히 도피의 메커니즘을 설명함에 있어 '무의식적인 힘'의 개념을 활용하여 사람들이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결국 자아를 포기하는 것 이 곧 '도피'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움직인 동기가 스스로 '믿고 있는' 동기, 즉 자신의 결정은 그들의 결정이라 확신하고, 그들이 무언가를 원하면 그것은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믿지만, 사실은 그것은 외부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5장에서 왜 제가 이토록 이 책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가 생각하는 사회과학 학문의 정점이 '행동 경제학'입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 행동 경제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소설과 철학과 심리학을 어우러서 되도록 많이 읽고 느끼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서 정점으로 제가 생각했던 질문들. '왜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인가?'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가?'에서 제가 나름 세웠던 가설(추측)이 실제로도 그러한지, 또는 아직 전혀 이유를 모르겠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감정들의 근원을 깨닫는 날이 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꾸 언급하게 되는 그 [생각에 관한 생각]이 행동경제학의 대가 대니얼 카너먼 교수의 대표작입니다.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뇌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고, 명백히 맞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이전까진 그런 의심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가능성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독서가 제게 준 선물. 오만과 편견을 인지하게 해 준 것입니다. 저의 생각 중 어떤 것이 그럴 수 있는 것인지 가려낼 순 없고, 인정한다는 것 만으로 그런 일을 방지하긴 어렵겠지만, 최소한 '제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열려 있는 태도를 가질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대니얼 카너먼(유대인) 이전에 먼저 에리히 프롬(독일인)이 그 무의식의 세계로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마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읽어보지 않은 많은 저서와 기록에서 그것에 대한 연구가 있었겠지요.
문득 비욘나티코 스님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도 같이 떠올랐습니다.
우연히 짧은 시간 서점을 들려서 펴보고.. 이 말에 울컥해 목이 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17년 동안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에 매진한 결과,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다 믿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얻은 초능력입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데 울컥 눈물이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모든 건 내 머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구나..!'
그리고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당시 몇 년의 시간 동안 무엇 하나가 저를 굉장히 힘들게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를 계기로 제 마음이 처음으로 치유의 문턱이 들어섰고, 이후 차원이 다르게 치유되는 계기가 또 있었네요. 모두 아주 우연한 것이었습니다. 살면서 처음 느낀 그 경험들이 이제는 제게 사람의 심리와 글쓰기에 대해 큰 영감을 주기까지 합니다.
이 책 이전까지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이 준 깨달음으로 기억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보니.. 책의 저자 비욘 나티코 스님은 정말 운이 좋게도, 세상이 자신에게 부응하도록 보낸 메시지가 아닌, 진정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분이었구나.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결정을 내린 사람이 우리라고 자신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그로 인해) 고독의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안락에 대한 더 직접적인 위험에 쫓겨 타인들의 기대에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욘 나티코 스님은 스웬덴에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스웨덴 대기업에서 초고속 승진을 하여 젊은 나이에 임원까지 (속세의) 성공가도를 달리신 분이셨습니다. 누군가 (특히 그분의 경쟁자)는 그가 그를 경쟁구도에서 놓고 내려간 낙오자(?)로 가지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분은 진정 내면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사회와 부모가 인정하는 그 직업이 자신이 정말로 되고 싶은, 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내면의 욕구라고 생각하는 경우라도 말이지요. 하지만 우연히 꾸는 꿈에 의해서 아주 오묘한 무의식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하고 그런 사례들도 이 책에서 이야기해 줍니다. 그리고 그 직업을 권장한 부모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가족의 두 얼굴]의 책에서 말하는 가정에서 영웅이었던 자식은 설령 그 기대에 부응해 영웅이 된 후라도 자신을 영웅으로 만든 그 부모를 증오한다는 것도 다시금 떠올랐습니다. 부모들이 느끼기에는 그것은 성장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고, 시간이 지나고 철이 들면 그런 감정은 없어진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왜 그 사실과 심각성을 부모들이 깨닫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는.. 저는 아마도 그 시점이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중년 이후에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일 거라 생각합니다. 한참 부모와 한집에서 살며 옥신각신 하고 이후 원하는 직업을 얻고, 사회 초년생이 되어서 이제 막 벌기 시작한 돈으로 부모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시점이 아닌, 자신의 내면의 자아를 다시 만나는 시점은 많은 사람들에게 훨씬 이후에 삶을 더 경험해 보고, 다시 반추하면서 오기 때문에 그것을 부모가 깨닫는 계기가 없을 거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소설 [데미안]에서 했던 헤세 자신의 이야기나,
부모가 짝지어준 배필과 혼례를 치르고 이제 자식으로서 할 몫을 다한 것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장차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며 행복해하는 두 어린 남녀를 두고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라고 했던 소설 [무정]에서의 이광수의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헤세도 결국 큰 방황을 거치고 나서야 자아를 지켰고,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헤세 역시 그 과정에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이광수 두 번의 결혼을 거치며 실제 경험한 결혼과 회의, 이후 운명의 사랑 이야기가 역시 그가 썼던 소설들의 주인공 이야기 같습니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3번째 메커니즘에서 글이 더 길어졌네요.!
어제 잠에 후기를 쓸 수도 있었으나, 약을 먹고 조금만 더 읽고 완독하고 쓰고 싶다는 욕심에 그만 다시 또 아침까지 이어졌네요. (아이 밥 차리고 뭐 하고 하다 보니, 이제 마무리는 점심에야 합니다.)
자주 반복되어 사과를 드리기도 무색합니다;
그래도 이전과는 다르게, 글을 쓰고 일요일을 보낸다는 사실이 몹시 행복합니다. ^^:
아이와 맘 편히 놀 수도 있고요,,!
독서를 통해 생각하고 느낀 점을 나누는 이 삶이 넘 행복하네요!
함께해 주시는 분들께 넘넘 감사합니다. ^^!
노트북 드림.
에구 노트북님 몸이 불편하셨었군요.ㅜㅜ 빨리 회복이 되셔야 할텐데요...
그 와중에도 독서와 후기 쓰시면서 행복하셨다는 얘기에 감동이 밀려오네요.
쓰신 글을 읽으면서 가슴이 쿵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깨달음의 쿵이였어요.ㅎ
권위주의나 파괴성 모두 불완전한 자아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설명해 놓은 글을 보니 더욱 확연히 인지가 되는 느낌입니다.
이런 글을 읽는 것은 사람들의 행태를 이해하고 나를 지킬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는 점에서 너무 소중한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서도 되구요
종교 개혁 이후 개인의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고 있는 종교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내게 그런 종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는지.. 내 안에 어떤것이 있어 밀어냈는지를 알게 되면서 좀더 스스로에게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틀릴수 있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 분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불교를 대하고 나니 어렴풋이 이해가 됩니다.
생각이 나의 불안감을 만들고 괴로움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완전히 이해했으니까요.
그래서 온전히 나를 세울수 있는 힘도 생겨나는것 같아요. 물론 아직 부족하지만요.
종교가 누군가에게는 좋은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지만 통제라는 개념에서 보면 또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가 강요했던 교육이라는 명목하의 폭력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 어딘가에서 또다른 씨앗을 만들고 있었을거란 생각에도 공감합니다.
제가 올렸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나오는 아마데우도 그랬거든요.
의사인 아마데우가 엄격한 판사의 아버지와 아들의 성공을 기대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드러내지 않는 압박으로 힘들어 했던 시절을 고백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원하지 않았던 의사로 살면서 어떤 일을 계기로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것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거라는 추측입니다.
내 안에 들어온 기억은 잊혀지는 법이 없지요. 어떻게 소화되는냐에 달라질수 있지만 어린시절 상처로 들어온 기억은 그대로 상처로 남아 성장의 한 켠을 내어주게 되어 있다 생각합니다.
교육과 육아의 중요성, 그리고 부모의 역할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글은 책을 읽은듯 큰 울림을 줍니다. 긴 글에 감사드립니다.
천천히 읽을수 밖에 없는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