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죽음이 감히 우리에게 찾아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죽음의 집으로 달려들어간다면 그것은 죄일까?" - 셰익스피어
이 책의 화자는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이라는 행위를 돕는 '자살안내자'로서 그들을 삶에서 해방(?)시켜주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처음 제목을 보면서 '파괴'의 의미가 '자살'을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이 자살률 1위라는 말이 있듯이, 주변에서 종종 그런 소식을 접하기도 합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외할머니께서도 그러셨고, 신랑 친구분도, 건너건너 아는 사람의 사연도 듣곤 했습니다.
이 책의 시작은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이 작품은 사실을 전제로 그린 것으로 프랑스 혁명가 장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 당한 모습을 담은 것입니다.
"내가 그린 마라는 너무 편안해 보여서 문제다. 다비드의 마라에게선 불의의 기습을 당한 젊은 혁명가의 억울함도, 세상 번뇌에서 벗어난 자의 후련함도 보이지 않는다."
이 구절을 보면서 화자는 죽음을 통해 '편안함'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그림 등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뢰인이 될 자격이 있는 잠재고객들을 물색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 둔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재고객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결국엔 (자살)계약을 맺게 합니다. 자살안내자의 이러한 행동은 보이는 것은 상처입은 어린 양들을 보살펴 주고 위해주는 듯 보이지만, 누구나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약해진다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해방을 명분으로 유약한 존재의 내면을 파고 들어 '자살'이라는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등장인물들과 얽힌 또는 그들간의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 이야기는 흘러갑니다.
소설 속 두번째 그림인 클림트의 '유디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인 인물로 푸른빛으로 표현된 육체는 시체로 보입니다.
그녀와 닮아서 '유디트'로 불려진 인물은 결국엔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인 것도 같습니다.
유디트는 노래방에서 우연히 K를 만나 그의 곁에 머물렀었고, K의 형인 C의 곁에서도 머물러봤지만 그들은 그녀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고 텅빈 무언가를 채울 수 없었던 유디트는 두 남자 곁을 떠나 다시 떠돌게 됩니다.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유디트는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자기의 공허함이 사라질 무언가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과거, 죽음체험으로 관속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던 그녀는 그 감상으로 '너무 편안하고 포근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유디트의 결핍, 공허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결국 떠난 길의 끝에서 자살안내자를 만나 계약을 하게 되고, 유디트는 가스를 마시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미미는 즉흥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인으로 '실재'와 대면하는 것을 진짜 예술이라고 생각했기에 촬영기법 등을 이용한 방법을 선호하지 않았지만, 누군가(화자인듯 함)의 추천으로 C와 비디오 촬영을 하게 됩니다.
"즉흥 퍼포먼스에 대한 모든 공격은 참된 아름다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인간들은 불멸에 대한 강박 때문에 참된 아름다움을 박제하죠. 그들은 죽은 예술에 길들여진 노예들이에요"
예술의 대한 의견차이로 언쟁이 있기도 했지만, 촬영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미미와의 촬영을 통해 C도 본인이 만든 세계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뷰파인더를 통해 쫓고 있는 C. 어느새인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방식에 익숙해져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카메라는 다시 그의 무기가 되고, 작지만 안전한 도피처가 된다."
미미 또한 자신이 진짜 예술다운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단 한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평생을 살아오 느낌이었어.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미미도 자살안내자를 통해 욕조에서 손목을 긋고 자살을 하게 됩니다.
화자는 "미미는 멋지게 떠났고, 유디트는 편안하게 갔다"고 말합니다.
유디트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 결국은 포기하고 자살이라는 것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했고, 미미는 자신이 확고히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것들이 무너지면서 삶을 놓아버린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들은 자살안내자를 만나자마자 충동적, 즉각적으로 그 선택을 내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얼마간의 고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다시 찾아 갈수 밖에 없었던 것은 세상에 그녀들을 잡아줄 한줄기 빛이 없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않았을까.
C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했지만, 결국 본인이 만든 안식처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는 삶을 선택합니다. C의 그런 선택이 얼마간의 안정감을 줄 순 있겠지만,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 또한 '잠재적인 자살'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는 한명일 뿐이고, 이는 K와 홍콩여자 또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나를 만나게 될것이다. 나는 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마지막 구절은, 전달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어느 순간 어느 한때에는 유디트가 될 수 있고, 미미가 될 수 있다는 것.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소설 마지막에서는 자살안내자 또한 자신의 삶에 무료함을 느끼고 쉬고 싶다는 마음을 내보이면서 그의 자살을 예측 할 수 있었고, 그 또한 예외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읽는 내내 상식적이지 않은 인물관계도와 난해한 내용에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지만,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힘든 감정과 희망없는 삶을 표현하기 위한 설정이지 않았을까. 유디트와 미미의 마지막에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이 자살안내자였기에 그런 결말이 있지 않았을까 싶으면서 그만큼 그녀들의 주변에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평소 친구들과는 결혼하고 각자의 가정을 꾸려나가기 바쁘고, 직장과 육아로 가족들의 안부는 뒷전이며, 동료들과는 형식적인 호의만 주고받는 관계를 새삼 반성했습니다. 따뜻한 말한마디, 작은 관심으로 누군가는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 주는 좀 더 밝은 내용의 책이 눈에 띄길 기대하면서, 힘찬 한주 보내세요😊
안녕하세요 가다쿵님
좋은 후기 글 감사합니다.
저는 김영하 소설을 참 좋아하지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는 특히나 우울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공감 하는 것이 쉽지 않기도 하고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인물들을 보며 마음이 좀 힘들었습니다.
유디트는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무언가를 찾아 계속 헤매는 모습이 참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마담 보바리'의 보바리 부인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내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있는데, 그게 나의 모습이 되었든 내 주변 환경이 되었든 내가 바라는 모습과 실제 나의 삶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을 때 결핍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전쟁 직후 우리나라의 모두가 가난했을 때에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충족되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마음 속으로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저 어딘가의 부유함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밥 한끼.. 정도였기 때문에 그것이 충족됐을 경우엔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요.
유디트가 마음 속에 품고있는 이상향, 완벽한 모습을 갖춘 관계가 어딘가에는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며 K와 C 등 여러 사람들을 만나지만 사실 유디트 마음에 있는 그 무엇인가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공허함을 온전히 채워줄 수 있는 타인이 세상에 있을까요?
마담 보바리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좇아가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는 것처럼 보이기에 위태롭습니다.
결국 자신이 바라는 모습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때 밀려드는 좌절, 혐오로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나...하고 어렵게 추측해봅니다.
사실 저도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아서 아무리 인물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다행인거지요. 죽음을 결심할 만큼 인생에 대한 공허함, 지친 삶과 나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느끼지 않았던 운좋은 인생을 살았으니까요.
참 저에게는 쉽지 않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문구가 인상적이네요. 누구나 어느 순간 어느 한때에는 유디트가 될 수 있고, 미미가 될 수 있다는 것.
저도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다쿵님의 좋은 후길 잘 읽었습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가다쿵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유쾌하지 않을 글들이었겠단 생각이 드네요,,!
이전에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을 아예 이해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고요.
(아마도 제가 너무 뭘 몰라서, 뭐든 다 제 마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던 때 였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각오로 살고자 했다면 되었을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은 '자살'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살기 위해가 목표가 아니고, 반드시 죽음에 이르러야 내가 정말 편안해 질 수 있다.
그 생각으로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생각을 한 것이 다자이 오사무 책을 보면서 였습니다.
실제로 자살 시도를 여러번 했었고, 결국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서 말한 그 대사들이 진심일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을 '희'로 표현하는데, 반드시 내가 도달해야 하는 지점. 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책을 읽으며 실제 자살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자신의 삶을 포기한 듯 함부로 대하다 죽게 된 작가 이상의 '날개'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 때 그 주인공은 겨드랑이에서 돋아나던 그 날개로 '자유'를 얻었을까,,!
그렇게요.
생각을 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무언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먹게 되는 것이 있자나요?
그건.. 정말 그걸 이뤘을 때만 끝이 나지, 이루지 못한 때는 언제나 가슴 속에 그것에 대한 열망이 남아 기필코 이루어야 한다는 다짐을 더 굳게 하게 되는 것 같은데, 그게 하필 '자살'로 꽂힌 경우가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일은 일어 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어서 두렵기도 하고요.
소설 마지막에 가다쿵님이 적어주신,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나를 만나게 될것이다. 나는 예고 없이 다가가 물을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 오라."
이 멘트가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부디.. 이런 휴식을 원할만큼 심신이 지친 시기가 오지 않길 기도할 뿐이네요.
가다쿵님의 후기만으로도 정말 많이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쩜 이렇게 심오한 책들만 가져 오신느지요..ㅎㅎ
가다쿵님의 실체(?)가 항상 궁금합니다.!!
이번주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
요즘은 자살 뉴스를 접해도 예전처럼 그리 충격적이지 않게 느껴지는것이 두려울때가 있습니다.
삶을 끝낸다는 것은 상상하는것보다 훨씬 무섭고 두려운 일임에도 잘못된 심리 상태, 그리고 생각으로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우울증이 자살로 이어지는 사례를 보면서 마음의 상태가 육체의 상태보다 더 중요한 일일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기도 합니다.
소설 속 자살자들 또한 정상적인 사고와 심리 상태는 아닐테고 그런 사람들을 자살로 유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설정은 그들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돕는다는 취지가 들어가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살자는 항상 외롭기때문에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있던건 아닌지..
결국 자살을 선택하긴 하지만 그들에게도 어떤 손길이.. 비록 자살을 유도한다 하더라도 덜 외롭게 보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제 눈에는 보이는건 저만의 느낌이겠죠. ㅋ
외로우면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삶의 의지를 놓는것에 취약해집니다.
옆에 사람이 있고 없고에 앞서 스스로 자신을 지킬수 있는 건강한 의지가 모두에게 필요해보입니다.
김영하님이 이런 소설도 쓰셨군요. 그분의 입담은 좋아하지만 실상 소설은 많이 안 읽었던터라 내용과 소설가님을 매치해보려고 애쓰며 읽었습니다. 재미있는 소재였어요. ㅎ
안녕하세요 가다쿵님
벌써 17번째 책이네요^^
저는 번호를 매기지는 않았지만
가다쿵님과 비슷하게 시작했으니 저도 얼추 가다쿵님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영하님의 소설을 읽으셨네요
제목에서 부터 자살에 관한 내용이라는 암시가 느껴져
책 내용이 무겁겠구나 짐작이 됩니다.
자살을 안내자라니 좀 충격적이네요
굳이 왜 도와주는 걸까요?
자살안내자의 이러한 행동은 보이는 것은 상처입은 어린 양들을 보살펴 주고 위해주는 듯 보이지만, 누구나가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약해진다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해방을 명분으로 유약한 존재의 내면을 파고 들어 '자살'이라는 길로 이끄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다쿵님의 말씀 처럼 한번쯤은 생각해 볼수 있는 자살이라는 생각을 증폭시켜 자살로 가게 하는 살인자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살 안내자 역시 자살을 선택했다고 하니 타인을 대상으로 예행연습을 한건가 싶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적으로 참 기댈 곳이 없고
외롭고 의미 없이 살아가고 있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행복해서 자살을 선택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오죽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을까 싶습니다.
요즘 제가 즐겨 보고 있는 에스콰이어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극중에서 40대 초반에 치매에 걸린 아내가
남편에게 좋은 모습으로만 남고 싶다고 하며
다른 나라에가서 존엄사를 택하고
아내의 유골을 들고온 남편은 자살 방조죄로 징역 1년의 구형을 받게 됩니다.
자살이 때로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있는 도구도 될수 있다는 생각에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 용기로 살아가면 어떨가 생각합니다.
후기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