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벌써 10월이 왔습니다. 결혼해서는 처음으로 갔던 동생네 가족, 부모님 세 식구의 여행은 잘 다녀왔습니다.~ ㅎㅎ
목포가 그렇게 잘 정비되고 매력적인 도시인줄 모르고 있었네요,,! ㅎㅎ
새삼 그 지역의 행정 담당자(공무원) 분들의 남모를 노고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정비야 어느 시점에 대대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다니면서 내내 도시가 참 깔끔하고 환경 미화도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요즘은 제가 사는 지역의 공원도 공사를 했는데 더더욱 너무 이뻐져서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는, 한 개인들마다 이렇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서 다 어디다 쓰는 걸까,,!
물론 치안 좋고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새는 돈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 막연히 있었습니다.
그만두고 나니 비로소 공원,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도서관, 박물관 등등의 시설을 누리며 이전에 낸 세금을 제대로 누리는 느낌입니다. ^^:
막상 세금을 내는 근로자들은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기는 쉽지가 않지요,,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지만,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저 같은 전업맘보다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의 생활과 집중을 위해서 집을 규모 있게 정리하고 있었는데, 거의 자리가 잡히고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몽영이님께서 올리신 인스타 그림일기를 보니, 이사를 대비해서 이것저것 많이 버리고 정리 중이신 것 같더라고요.. ㅎㅎ 저의 요즘 일상이 떠올라서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
저는 매주 토요일 밤만 고요한 자유시간을 갖는 것 같아요,!
책도 읽고 글도 쓰는 이 시간이 저의 온전한 자유 시간입니다.
(주중에는 아들이 아직 늦게 자기도 하고, 또 낮에 활동할 에너지를 위해 아들과 함께 하다가 잡니다.
건강이 너무 안 좋아져서 시작한 달리기인데, 이전에는 아들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일어난 시간을 독서에 썼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운동에 써버리니, 맘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달리기는 웬만하면 주말이나 공휴일 새벽만 하고 주중에는 원래 루틴대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집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으니, 집안일도 하루 얼마 이상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요..ㅎㅎ^^:
엑셀로 일주일 동안 일어나서 하는 일들을 다 계산해 봤더니, 좀 더 계획이 잡히더라고요!
참 시간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ㅜㅜ)
이번주도 완독을 못하고 이어서 읽었습니다.
4장.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까지 읽었습니다.
많이 어려운 책이지만,
간단히 요약을 해보면..!
1장. 자유 - 하나의 심리적 문제인가?
에서는 인간이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의 이면(고독, 고립, 불안, 복종에 대한 동경)을 이야기하고,
이 불안이 일어나게 된 원인( 이 책의 목적)에 대해 화두를 던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아무 장이나 딱 한 장만 읽어도 이 책의 목적을 모두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양질의 내용이 가득하기도 하고, 또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기도 합니다. ^^..! (그런데 아무리 반복돼도 어려워서 싫증이 나진 않네요..ㅎㅎ 오히려 반복해서 읽어야 알 것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
2장. 개인의 출현과 자유의 다의성.
에서는 르네상스부터 완전한 개인이 출현한 배경과 인간에게 자유의 의미(인간 존재와 자유는 처음부터 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역시 이번 장에서도 자유를 얻으면 생기는 고립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그 순간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는데, 나중에 아들이 커서 저희 부부의 말에 완전히 반기를 들더라도, 그것은 아들의 진정한 '이성'이 시작하는 시점이라는 뜻으로 생각해야겠습니다.
권위의 명령에 거역하고 죄를 짓는 것은 긍정적인 인간적 측면에서 보면 최초의 자유 행동. 즉 최초의 '인간적인' 행동이다.
자유 행동으로 신의 명령에 거역한 불복종 행위는 '이성'의 시작이다.
지난주 후기에서 쓸까 말까 하다가 못 쓴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상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고 보니, 그렇게 그 시간이 행복하고 충만하게 느껴졌었는데요,,!
이 책을 읽으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 고립/고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사랑이나 생산적인 일 같은 자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아이를 돌보며 원 없이 사랑하고 있었고, 또 깊은 밤에는 주로 당시에는 매일 글을 썼기 때문에 무언가 생산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직장인들도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 동기부여를 받고 성취를 느끼고 행복해합니다.
저는 그런 기쁨이 전업맘의 생활보다 훨씬 클 줄 알았고, 처음에는 분명 엄마기 때문에 저의 반쪽을 단념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활은 정말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경제 활동으로서의 일을 할 때 보다, 2세를 키우고 창작(?) 활동을 한다는 것이 한 단계 더 수준 높은 일이며 더 가치 있고 인생을 가장 낭비 없이 사는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습니다. 경제적 일이 아니어도 이렇게 정신적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일만 하고 겪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아니, 제가) 얼마나 편협했는지를 느끼는 부분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가 일을 할 때는 (경제 활동으로의)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만족스럽고 아무래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막상 그 경제적 일을 그만두니, 이번에는 (회사)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짠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아직 회사 근처에 살기 때문에 아침 일찍 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회사 사원증을 매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대부분은 피곤에 쩔고 어두운 표정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니 제가 본 분들은 거의 그런 표정으로 출근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삶이 가장 나은 삶이라고 해서 그렇게 살고 있겠지..! 절대 이 삶의 비밀을 모르고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아빠에 이어 엄마까지 버는 집의 아이들이 훨씬 풍족할 거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막상 일에 치여.. 함께 해주는 시간도 적고,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누리지도 못하고 돈은 쌓아만 두다가 가끔 해외여행에서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침부터 저녁 퇴근 때까지 어린이집, 유치원 안에서 계속 기다리는 아이들이 훨씬 짠합니다.ㅜ
이제는 저도 외벌이라 수입은 딱 반으로 줄었지만, 낮에 아들이 큰걸 안 해도.. 엄마와 도서관 가고, 도시락 싸서 등산 가고, 미술관/전시회도 가고,, 여기저기 필요하다는 수업 스케줄 짜서 엄마랑 함께 다니고 하는 삶이 훨씬 값지게 느껴집니다. 물론.. 아들이 물려받을 돈은 적은 게 아니라, 저희가 노년에 쓰면 거의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그게 다가 아니고 각각의 필요한 시기에 내면을 채우면서 사는 것도 재산을 축적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나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쪽 삶 밖에 모를 때 생각이 어찌 보면 참 철없었다는 생각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만족으로 삶을 살고 있겠구나를 느꼈던 계기를 말씀드리는 거네요,,!
어느 삶이든 포기하는 대신에 값지게 얻는 것이 있는 건 명백하니까요,!
각자는 자신의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3장.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
에서는 공동체의 삶에서 개인으로서의 자유의 개념은 크지 않았지만, 공동체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하던 중세에서 자본주의로의 과도기를 겪으며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개인의 출몰에 대해서 한번 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몇 줄로 접했던 그 루터와 칼뱅의 프로테스탄티즘이 이렇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내용이 너무 깊고 방대하지만 정말 간단히 이야기하면, 루터와 칼뱅은 그 시절 거대 자본 앞에 무력함과 불안을 느끼는 중산층(루터는 농민에게 까지)에 호소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그 감정에 정확히 공감하며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신 앞에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무력화시켜 신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자기 비하와 인간적 자존심의 파괴가 그 사상 전체의 중심을 이룬 것입니다. 이 내용이 상당히 길었는데, 읽는 내내 제가 왜 다른 사람의 종교로서는 인정하나, 저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알랭드 보통도 현대인의 불안의 해결방법 중 하나로 종교를 제시했을 만큼 그들이 누리는 영적 평화를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접하지도 않았던 기독교를 지인을 따라가서 알게 되었는데, 왜 자신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을 죄인이라 여기고 오직 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에 지극히 평범한 장로교회를 권유에 못 이겨 두 번 정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위기가 꼭 사람의 영혼을 죽이고 자연스럽게 군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 거의 그렇게 묘사합니다. 아마도 저나 저자와 같이 깊이 있는 종교 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교리를 그렇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 장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어떤 사상, 예술, 문학이든 그 시대의 공감을 받는 것이 한 획을 긋는다는 것입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이상의 [날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광수의 [무정][유정][흙] 등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전후를 살았고, 그 시절과 그 이후의 조국의 참담한 상황들을 그린 작품 들입니다.
이 작품들에서 공통적인 감정을 하나 뽑으라면 개인의 무력함입니다.
왜 그 시절 젊은이들은 열광했는데, 특히 이상과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들은 요즘의 의기양양한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경악스러울 만큼 무기력합니다. 우리나라,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럽 역시 그 시절 소설들에서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게 그 시대상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잘 공감받기 힘들지만, 그 시절 젊은이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모두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의 그 비참한 상황을 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해 줄 수 없는 비극적인 참담함을 거의 모두가 느꼈던 기본 정서일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기만 해도 동정이 가고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주인공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위로하고픈 그 감정이 그 시절의 대표적인 소설들로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요즘의 이 거대 인플레를 동반한 자본시장에서 개인들의 부에 대한 열망, 불안을 공략한 유튜버(크리에이터)들이 대성공을 거둔 것들과 비슷한 예인 것 같습니다.
루터와 칼뱅 역시 그 시절 거대 자본들이 등장하며 무력해지는 개인들과 빈곤층의 그 불안함, 억울함을 대변하며 해법까지 제시해 하나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자본주의에서만 산 우리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가 만든 경주마 같은 인간상이고 그 이전에는 노예가 아니고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지난주 후기에서도 살짝 언급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 조차 몰랐던.. 저의 그런 자본주의에 잘 적응하려는 성향들이 타고난 것인 줄 알았는데,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자본주의에 찌든 사상을 그대로 교육받고 흡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자본주의 시대에 경제활동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런 생활이 너무나 가치 있고 의미 있다 느껴집니다. 중세 시절의 귀족(자유민)은 '보다 고상한' 일에 몰두하며 살아갔다고 합니다.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 열중한 것이지요. 저 역시 지금은 그것이 경제 활동 보다도 더 한 단계 높은 수준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귀족들이 그렇게 살아서 몰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귀족이.. 훨씬 수가 많았던 노예와 소작농들의 노동력에 자신의 노동력을 합치지 않은 그 간극을 채우지 못해 망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00명의 노동력에 본인의 생산력 1을 합치지 않아서 망한 것이 아니고, 인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돌보지 않아서 몰락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노예와 소작농이지만 '역지사지'가 되지 않고 관계를 돌보지 않고 일방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직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지금의 제 입장에서 드는 생각을 써봤습니다.)
4장. 근대인의 관점에서 본 자유의 두 측면
에서는 소극적인 자유(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적극적인 자유(무엇을 위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예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장의 내용은 다른 장보다 내용이 더 비약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짧게 내용은.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자기가 만든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의 주인이 되었고,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 인간의 신이 되었다는 뜻이고,
인간은 여전히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지만,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꼈던 무력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 심리를 탐구(5장)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무력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알랭드 보통의 [불안]의 어려운 버전 같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 창작활동, 능력주의(자본주의), 불확실성,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가 그 책의 소 카테고리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너무나 내용이 비슷한데, 이 책이 더 역사적 배경을 잘 설명하고, 좀 더 철학적, 심리적 접근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불안]을 읽고, 내용에 매력을 느낀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도 좋은 수순일 것 같습니다.
토요일부터 읽고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져, 새벽에 쓰다가 아들이 일찍 깨서 밥 먹이고 다시 쓰느라 더 늦어졌네요. 근본 원인은 제가 늦게 읽고 늦게 쓴 게 원인이고요,,;;!
날씨가 모처럼만에 너무 청량해 날씨 따문에라도 그냥 기분이 좋은 날들입니다.~~
모두 모두 이 잠깐의 가을을 만끽하시길 바라며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
노트북 드림.
노트북님의 후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책도
에히리 프롬이 쓴 책인데, 읽으면서 어렵다 느껴서
제가 정리가 안되어서 후기를 쓰지는 못했지만,
같은 저자의 노트북님 책 후기를 읽다보니
비슷한 내용들이 많이 있었던것 같습니다.
아무튼 에히리 프롬의 책은 한번 읽어서는 이해가
힘들다고 느껴집니다.
현대인의 삶속에서 불안이 언급되고,
또 이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바쁜 일상으로 도피하기도 한다는 내용도 있었던것 같고, 인간이 만든
물질에 인간이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이용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들도 있었던것 같습니다.
노트북님이 일을 그만두시고 육아에 전념하시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저도 고스란히 느껴봤기에
후기에 쓰신 글들이 무척 공감되고 와 닿았습니다.
아마도 사람은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할때 가장 행복감을 느낄것 같습니다.
직장을 다니거나 경제활동을 한다면 아무래도
자발적이지 않은 일들도 해야만 할것이고,
그 시간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하게 할수도
있으니까요.
저도 회사를 다닐때는 집앞 한강 공원 조차 나갈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한번도 나가지 못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한강공원을 산책해보니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더라고요.
지금은 온전히 제 주위에 있는 모든것을
누릴수 있으니, 이것은 회사를 그만두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마도 제 능력이 두가지를 병행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어느것이 좋은 선택인지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맞벌이로 열심히 육아와 병행하시는 분들께 응원을 보냅니다.
그리고 육아에 올인하며 자신의 삶을 다른
무언가로 채워 나가시는 전업맘들도 응원하고요.
두가지를 다 해보고 돌아보니
그때 그때 다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다.
제가 워킹맘을 해 보았기에 직장인들의
고뇌와 힘듦도 이해할 수 있는것이고,
또 그때의 힘듦을 견디고 자금을 조금 모았기에
지금의 오늘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살아온 자신을 칭찬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끔은 스스로 토닥토닥 하는것이 좋은것
같아요.ㅎ)
회사를 그만둔 후에는
무엇인가를 버리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트북님의 글을 통해 저를 돌아볼 수
있었던것 같아서...
오늘도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글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언제나 이렇게 긴글을 정성스레 써주시니 허투루 읽게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노트북님의 글은 항상 각 잡고 읽게되는 글입니다. 이번 글도 역시 한권의 책을 읽은듯 생각하는 바가 많아져서 할말도 많아집니다. 생각한대로 다 쓸수있을지 모를만큼요.
일단 신의 불복종의 모습이 이성의 시작이라는 말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충격적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제가 교회를 거부하는 것도 그것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교회에서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신에게 나의 삶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의 뜻대로 살것을 고백해야하는 자세가 내가 생각하는 삶의 태도와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이어야하는 거 아닌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신이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며 살아야하는 무력감이 싫었습니다. 지금 공부하는 불교는 그와는 반대입니다. 삶의 주체는 온전히 나에게 있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야한다고 강조하고 있거든요.
종교개혁 시대의 자유의 의미를 종교에서 찾았다는 말을 듣고 보니 지금의 교회의 방식이 그때 시대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만약 그렇다면 시대가 많이 바뀐 지금 그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더욱 강하게 듭니다. 지금은 개인이 핵개인화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고독을 해결하는 방법이 교회밖에 없다며 너무 우울할것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더 시대에 맞는 다른 방법이 강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게 종교라 할지라고 말입니다.
귀족들의 일상으로 사는것을 예전에는 좀 한심하고 이기적인 행태로 치부했었는데 저도 그런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거 같습니다. 노트북님이 경제생활을 접고 가족에게 좀더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만족감을 얻는것이 저도 진정한 행복이라는 생각에 적극 공감합니다. 물론 누군가가 경제활동을 해야하는게 맞고 그게 기본값이 되는게 맞지만 더 많은 재화를 쌓는것이 옳은가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거든요.
적절함의 기준은 다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건 가족의 웃으며 생활할수있는 시간에 인간의 행복의 중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왔다갔다했네요. ㅋ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할수있어 즐거웠습니다.
좀더 많은 애기를 나누면 좋겠는데....제가 노트북을 오래 보는 일이 어려워요. 특별한 병이 있는게 아니라 30분 이상보면 눈이 아파서요...그래서 빨리 쓰려고 하니 마음만 바쁘게 제대로 된 얘기를 못하는 게 항상 아쉽습니다.
그래도 짧게 짧게 자주 쓰려고 하는데 그러면 또 맥락을 놓칠수가 있어서요....
나이드는게 나쁘진 않은데 이럴때는 좀 아쉽긴 합니다. ㅋ
오늘도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