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없이 하루를 보내고 일주일을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지.. 그렇지 못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심심한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전 이렇게 계속 심심한 일상을 보내며 살고 싶어요.
하지만 결코 심심하지는 않습니다. 겉으론 심심해 보일지 몰라도 제 마음속은 이미 설레고 기쁘고 때론 흥분하며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까요. 그건 책이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책을 보면 알수없는 희망이 생겨요. 딱히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폴 오스터가 제대로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발점이 되는 책입니다.
이 소설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고 연이어 나오는 소설들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모두 갖춘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로 자리 매김하게 됩니다.
오래전 처음으로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제게는 이 소설은 도데체 독자에게 뭘 전달하려는 의도인지 도통 이해가 안되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딱히 끝맺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가슴 울림을 주는 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때까지 나의 소설 읽기가 기승전결, 인과응보... 또는 교훈, 감동으로 마무리 되었던 때문에 전 책이란 이래야한다는 생각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폴 오스터를 알고부터 전 소설 속 알수없는 모호함 속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를 찾아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식의 소설 읽기는 밀란 쿤데라를 비롯한 이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소설에서 얻지 못했던 감정을 알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소설 읽기의 업그레이드가 실행되었다고 볼 수 있죠.
그건 내 우주가 한껏 넓어졌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경험은 신비롭고 황홀합니다. 그때부터 소설 읽기는 훨씬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그만큼 나의 기쁨은 배가 되는 경험을 느끼게 됩니다. 이건 사실 글로는 표현이 안됩니다. 제 표현의 한계가 아쉬운 시점입니다. ㅋ
어쨌든 폴 오스터는 제게 특별한 작가이고 애정하는 몇 안되는 작가입니다.
그의 책을 하나씩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이미 재독 삼독을 한 작품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읽고싶은건 그의 책이 유일할겁니다. 이런 작업이 제게 희망이라는 단어로 자리매김을 합니다. 뭔가를 더하고싶은 마음.. 그게 제게는 희망이라는 감정입니다. ㅎ
이 소설은 3개의 소설로 엮여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소설이라 내용이 딱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의 소설이 제게는 대부분 그렇습니다.ㅋ)
첫번째 소설은 유리의 도시라는 소설인데 해설면을 보면 이 3편의 소설이 어떤 식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소설의 내용이 저도 딱히 기억이 안나서 이제 다시 읽어봐야 알겠지만 대충 짐작은 갑니다. 처음도 끝도 없는 순환고리 형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뉴욕 3부작'은 근본적으로 글쓰기라는 창조적인 과정과 또 하나의 독립된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을 잃어 가는 작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신으로, 즉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성공을 거둘지 어떨지는 미지수로 남아있다.
탐정 소설의 형식을 취한 이 작품에서 오스터는 현대의 빡빡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본성과 언어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충동과 강박을 보여 준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정체성이며, 자신에 대한 감시와 우리가 자신의 정체라고 여기는 것의 와해가 이 소설의 본류를 이루는 주제이다.' (해설에서)
그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걸어 올라가면서 자기가 이제는 더 이상 스틸먼을 뒤쫓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자신의 절반을 잃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지난 두 주 동안 퀸은 그 노인과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틸먼이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 그도 따라 했었고, 스틸먼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그도 따라갔었다. 그런 이유로 퀸의 몸은 새로운 자유에 길이 들지 않아서 처음 몇 블록을 그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마법의 주문은 풀렸지만 그의몸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본문에서)
퀸은 아내과 아들을 잃고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작가입니다. 탐정소설을 쓰고 있는 어느 날 밤, 한통의 전화를 받고 그의 삶은 180도 변하게 됩니다. 자신을 탐정 폴 오스터로 오해한 의뢰인의 사건 의뢰 전화였습니다. 반복되는 의뢰인의 전화에 퀸은 스스로 자신이 폴 오스터로 착각하게 되고 사건을 접수합니다.
전화를 건 이는 버지니아 스틸먼으로 자신의 남편이 아버지로부터의 추격을 피하게 해달라는 의뢰였습니다.
남편은 어린시절 교수인 아버지 스틸맨로부터 언어 이전의 원초적 인간 언어에 대한 실험 대상으로 갇혀 사는 학대를 받았던 우울한 남자였습니다. 그 아버지가 곧 출소를 하게 되고 그러면 분명 아들을 찾아올거라는 두려움이 있어 아내가 의뢰를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어쩐지 퀸은 그일을 맡아야할것 같은 생각에 사로 잡힙니다. 그리고 사건을 접수합니다. 자신이 탐정인채 하면서 말입니다.
퀸은 아버지가 기차역을 통해 들어올것을 예상하고 기차역에서부터 그를 미행하고 용감하게 말을 시키는 접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미행을 하고 대화를 하면서 점점 아버지 스틸먼의 언행과 철학에 몰입하게 되고 그러면서 스스로 정체성과 현실감의 잃어하며 무너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문득 자괴감과 함께 혼란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일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합니다.
어느날 미행하던 스틸맨이 보이지 않자 그의 호텔 앞 쓰레기장 속에서 날밤을 세우는 자신을 보면서 고립감과 자괴감으로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버지니아 스틸먼을 찾아가지만 그곳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겁니다.
버지니아 스틸먼의 텅 비어버린 집에 들어선 퀸은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혼란으로 멍한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을 갔지만 그곳도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 그의 물건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스틸먼을 쫓는 와중에 진짜 폴 오스터를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그 역시 탐정은 아니었고 어느날 그로부터 스틸먼이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것이 사라진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도 결국엔 화자는 퀸이 아닌 폴오스터(소설속 인물)의 친구인 저자로 폴오스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소설 말미에 나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화자 즉, 관찰자가 퀸이 아닌 다른 인물이었다는 사실, 퀸을 두고 모든것이 사라진 황당한 상황, 퀸 스스로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겪게 된 일이라는 사실.. 그 어떤 것도 명확한 이유나 확신도 없고 결론도 없는 마무리.
하지만 그런 상황이 중요한건 아닌것 같습니다.
이런 사건에 말려든 퀸이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 진행 과정에서 보여지는 정체성의 혼란 등이 서술되어지는 과정에서 엉뚱한 그의 행동에서 독자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잊어버렸거나 억눌렸던 나 자신의 일부를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사건 접수부터..이해되지 않는 그의 행동들이 어쩌면 나도 모르던 나의 이면일수 있다는 겁니다.
명확하게 저자의 의도를 깨달은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나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확장해보려는 시도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던 소설이었다 생각합니다.
탐정이 아님에도 사건을 접수 받는다는 설정부터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 그의 소설은 다 말이 됩니다. 아니 설득이 됩니다. 그래서 이게 뭐야?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의 필력에 감탄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그를 좋아하는 부분이 이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책안의 대화에서 돈키호테의 음모론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혹시 이미 알게 계신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 처음 듣는 얘기라 너무 흥미로웠거든요.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실제작가가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그를 정식 저자라고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의심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돈키호테가 지나치게 정교하고 다층적이라 세르반테스가 혼자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1부와 2부의 문체나 주제 접근이 다르다는 건데 그래서 공동 집필설이나 유령 작가설까지 떠돌로 있다는 겁니다. 정말 세르반테스가 진짜 혼자 집필한것이라면 그의 능력이 특출했다고 밖에 설명이 안되겠네요. ㅎ
지난 후기에도 세익스피어 음모론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연속으로 음모론 얘기를 하게 되네요. 제가 아직 모르고 있는 이런 식의 루머가 학계에는 꽤 많을수 도 있겠구나 싶으면서 이 또한 능력의 뛰어남에 대한 시기에 의한 해프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제 다른 두 편의 소설을 읽고 세 편의 소설을 어떻게 작가는 연결시키려 했는지 가늠해보겠습니다.
나날이 좋은 날씨로 모두가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딸기님! 반갑습니다..^^..!
딸기님께서 말씀 하시는, 그런 심심한 일상이 저도 너무 그립습니다.
저도 그냥 혼자만의 아주 여유롭고 남이 보면 따분할 만한 그런 일상을 꿈꿀 때가 있네요,,!
지금은 제가 부족한 탓이겠지만 항상 무언가 분주한 느낌입니다.
지지난주 딱 하루. 김영하 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러 갔던 그날의 온전한 자유를 잊을 수가 없네요..!
제 일상이 훨씬 지난 후에 그런걸로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모든걸 이미 다 겪으신 딸기님께서 그 진정한 자유를 누리실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소설 이야기가 참 흥미롭네요,,!
저같아도 이러한 소설을 읽고서 제대로 이해 한것이 맞을지, 제가 들었던 생각이 맞을지..
궁금하고 미묘하게 여운이 남을 것 같습니다.
딸기님께서 폴오스터라는 작가를 이렇게 깊이있게 이야기해주시니, 저 또한 많이 관심이 갑니다.
딸기님의 글에서도 언제부턴가 깊이와 넓어짐이 느껴졌는데요,,!
딸기님 스스로 느끼시는 독력의 성장도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오래 즐기면서 계단식 성장을 경험할때의 그 성취감. 행복감을 딸기님께서 느끼시는 것 같아 그 마음이 부럽고 저도 넘 좋습니다..^^!
줄거리만 들어도 흥미롭겠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도 함께 드네요.
저는 왜 그런지 이전에 가다쿵님께서 공유해주신 [적의 화장법] 책이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주인공이 살해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
당시에 책 후기가 참 충격적이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이 책 역시 마지막 스틸맨의 자살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창조하기 위해 그 기간 자신을 잃어가는 것.
그것이 혹시 배우들이 한 작품을 시작하여 끝나기 까지, 자신이 아닌 그 주인공으로 살게된다는 그런 경험을
작가가 녹여낸 건지도 궁금하고요.
현실과 허구 사이를 넘나드며 정체성에 상당한 혼란을 겪는 듯한 이 꿈과 같은 장면들이 무엇을 전해주기 위해 썼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책을 읽지 않은 저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힘드네요,,!
언젠가 제가 폴 오스터 작가의 책을 읽는다면, 그것은 딸기님의 후기덕분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지난주에 이어서 셰익스피어 음모론에 이어서, 돈키호테의 음모론이 재미있네요.
아주 단순하게 들으면 두 음모론 모두 작가가 매우 뛰어나서 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한 사람이라면 정말 기분이 좋을일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음모론으 만든 사람들의 능력으로는, 한사람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니까요..ㅎㅎ
갑자기 가수 김종국이, 약을 하지 않으면 그 나이대에 그렇게 만들고 유지 될 수 없다는 개인 유튜버들을 보면서
나는 그냥 한건데, 이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냐. 며 인정해줘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후기가 어려워서 댓글로 나누기가 어려울때도 많네요^^:
다양한 책들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